홍천문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3] 홍천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을까?
홍천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을까?
용석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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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17 [13:14]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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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을까?

 

▲  태조 이성계가 용희수에게 보낸 제문( 龍希壽 緖之子 檢校工曹判書太祖有祭文 ) 홍천군 몽면 덕치리  ©용석춘 기자

 


홍천읍지를 읽다보면 제법 친근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김효성(金孝誠)이 그렇고, 윤번(尹璠)이 그렇고, 용득의(龍得義), 용희수(龍希壽), 심희수(沈喜壽)가 그렇다.

 

13개의 홍천읍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김효성이다. 무려 10개의 읍지에서 김효성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을 기록하지 않은 세종실록지리지, 관동지, 대동지지를 제외하면 모든 읍지에 기록된 사람이다.

 

사람이 나오는 항목은 寓居(우거), 名宦(명환), 人物(인물), 名官(명관), 仕宦(사환) 등이다. 명환, 인물, 명관, 사환은 벼슬을 지낸 명망 있는 사람을 말한다. 우거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정착하지 않고 임시로 머물러 사는 것을 말하지만, 대개 노년에 풍광 좋은 곳에서 은거하는, 요즘 말로 얘기하면 은퇴 후 즐기는 전원생활쯤으로 생각해도 될 듯 싶다.

 

▲   김효성의 묘  북방 하화계리 능뜰공원 내   ©용석춘 기자

 

 

김효성은 북방면 화계리에서 우거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우거(寓居)항목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 김효성. 세종 때 여러 번 장수를 지냈다. 후에 정난공신이 되었다. 연산군에 봉해졌다.1김효성이 말년에 홍천에 기거했음을 적고 있다. 공작산에 태를 봉안한 정희왕후의 지아비였던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을 도운 공을 인정받아 정난공신에 올랐다.

 

동국여지지에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조선 김효성. 연안 사람이다. 장헌왕 때 여러 번 장수를 지냈다. 후에 정난공신이 되었다. 연산군에 봉해졌다. 관직은 공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양효다.2마지막 관직이 공조판서였다. 장헌왕은 세종이다.

 

혼란스러움은 여지도서부터이다. 여지도서적힌 김효성에 관한 글이다.

 

김효성. 현의 서쪽 5리쯤 화계에 살았다. 세종 때 여러 번 장수를 지냈다. 후에 정난공신이 되었다. 연성군이다.3북방면 화계리에 우거했음을 구체적으로 적었다. 혼란스러움은 연산군연성군으로 바뀐 점이다. 뒤를 이어 발행된 화산현지, 홍천현 읍지 백운정사 필사본, 관동읍지』 『홍천군읍지등이 여지도서연성군을 따랐다. 홍천현읍지는 이런 상황이 혼란스러웠는지 을 공란으로 남겨뒀다. ‘이 아닌 으로 잘못 적었다.

 

홍천읍지강원도지에 와서야 연산군으로 돌아왔다. ‘김효성. 연안 사람이다. 무인으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단종 계유년에 정난원공에 오르고 연산군에 봉해졌다. 승록대부에 올랐다. 서울에서 내려와 우거했다. 시호는 양효다.4강원도지에 실린 내용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연산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먼 길을 돌아 연산군으로 정착한 것이다. 김효성은 말년에 홍천 북방면 화계리에서 살다가 능평리에 묻혔다. 북방면 능평리 능뜰 근린공원에 김효성의 묘가 있다.

 

김효성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 윤번이다. 7개의 홍천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윤번에 관한 기록은 짧다. ‘本朝 尹墦 爲縣監. 조선. 윤번. 현감을 지냈다.’ 윤번은 정희왕후의 아버지다. 정희왕후는 세조(수양대군)의 왕비다. 홍천읍지 여러 권에 정희왕후의 태를 공작산에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孔雀山 安貞熹王后胎

 

 

▲  홍천남면 금학산 수태극(용득의 문하시중이 금학산에 용수사, 학명루 지어)   © 용석춘 기자

 


다음으로 많이 기록된 사람은 용득의, 용희수, 심희수이다. 모두 5개의 홍천읍지에 소개되어 있다. ‘고려. 용득의. 홍천사람이다. 문하시중에 삼태사에 올랐다.5용득의는 팔만대장경 제작을 총지휘한 사람이다. 말년에 금학산에 용수사와 학서루를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홍천 용씨(龍氏)의 시조다.

 

 

 

▲    태조제문(홍천 동면 덕치리)  © 용석춘 기자

 


용희수는 용득의의 5세손이다. ‘용희수. 용서의 아들이다. 공조판서를 지냈다. 태조의 제문이 있다.6용서(龍緖)가 용득의의 4세손이므로7용희수는 5세손이 된다. 태조의 제문 원본은 6.25 때 소실되었지만 제문의 내용은 동면 덕치리 홍천 용씨 사당(화산제) 현판에 남아 있다. 인터넷은 물론 2018홍천군지에 용희수가 용득의의 6세손으로 되어 있지만 홍천읍지 기록은 5세손이다.

 

심희수 역시 기록은 짧다. ‘沈喜壽 號一松 官議政 심희수. 호는 일송. 의정에 올랐다.’ 의정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말한다. 심희수는 그의 나이 33살이었던 1580728일 홍천 현감으로 부임해, 15821125일 퇴임했다.8

 

 

▲    서면 한서 남궁억 선생 기념관

 


강원도지에서 귀에 익은 인물이 등장한다. 남궁억과 이항로, 이구다. 남궁억은 명류(名流) 이른바 유명인사 요즘 말로 셀럽((Celebrity) 항목에 기록되어 있다. ‘남궁억. 호는 만산이고 함열 사람이다. 간의민의 후손이다. 성품이 탁 트였고, 밝고, 중후하고, 우아하며, 속이 깊고 마음이 넓었다. 가문의 후광(蔭敍)으로 참봉을 지냈다. 일찍이 칠곡 군수를 맡아 다스렸다. 치적이 많아 선정비가 세워졌다. 위암 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사를 세워 붓을 잡았다. 신문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만년에는 시골마을로 돌아와 홍천서면 모곡에 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수백 편의 문집을 남겼다.9일제강점기에 제작된 탓에 독립운동과 무궁화 보급 운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시골마을은 서면 보리울이다.

 

이항로는 강원도지우거(寓居)에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항로. 호는 화서이고 벽진 사람이다. 평정공 약동의 후손이다. 성품이 대쪽 같고 강직했으며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성리학을 공부했으며 이조참판에 천거되었다. 정조 때에 유생들의 상소에 직언을 많이 했다. 순조 때에 양근(양평)에서 와 외삼포에서 우거를 시작했다.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제자로 면암 최익현,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이며 유집이 있다.10

 

이구는 능묘(陵墓) 항목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판결사 이구의 묘. 홍천면 결은리 사동 정남향에 있다. 대사헌 유색이 묘갈 글을 지었다.11묘비(墓碑)는 지붕모양의 덮개돌이 있는, 묘갈(墓碣)은 지붕 모양의 덮개돌이 없는 비석을 말한다. 이구는 본인이 지은 사미정(四美亭)에 올라 홍천강을 바라보며 차 한 잔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른바 한송재 김기도가 지은 화산 8중의 하나인 미정자애(美亭煮艾 사미정에서 차를 다리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많은 인물들이 노년에 홍천에서 우거를 했다. 그들을 사로잡은 게 이구 가 말한 사미(四美)일지도 모른다. 사미는 좋은 때(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완성하는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년에는 풍광 좋은 곳에서 차 한 잔 우려내 마시는 즐거움이 으뜸인 듯 하다.

 

 

1. 本朝 金孝誠 世宗朝 屡受閫寄 後爲靖乱功臣 封延山君. 신증동국여지승람

2. 本朝 金孝誠. 系出延安 莊憲王朝 屡受閫寄 後爲靖難功臣 封延山君. 官至兵曹判書. 諡 襄孝. 동국여지지

3. 金孝誠 居縣西五里許花溪 世宗朝 累受閫寄 後爲靖難功臣 延城郡. 여지도서

4. 金孝誠延安人 武科 官至兵判 端宗癸酉 錄靖難元功 封延山君 陞崇祿. 自京來寓 諡襄孝. 강원도지.

5. 高麗 龍得義 洪川人 官領三台事. 여지도서

6. 龍希壽 緖之子 檢校工曹判書太祖有祭文. 홍천현 읍지. 백원정사 필사본

7. 龍緖 得義之四世孫 本朝 龍城府院君. 홍천현 읍지. 백원정사 필사본

8. 沈喜壽 庚辰七月二十八日到任. 壬午十一月二十五日辭狀遞去. 號一松 官止右相. 화산현지

9. 李朝 南宮檍 號晩. 山咸悅人. 諫議敏后. 踈曠典雅沉弘有量. 蔭參奉. 嘗宰漆谷治化大致 有善政碑與. 偉岩張志淵刱皇城新聞社自秉筆 有新聞自此始. 晩年歸鄕里 築毛谷學校 獎勵後進盡力敎務. 有遺集數百篇. 강원도지

10. 李恒老 號華西 碧珍人. 平靖公約東后. 性簡亢少許潛心. 性理之學以逸薦吏參判. 正祖朝 儒疏多直言. 純祖朝 自楊根始寓外三浦 獎進後學. 門人有 勉菴 崔益鉉, 重菴 金平黙, 省齋 柳重敎 等. 諡 文敬 有遺集. 강원도지

11. 判決事 李龜墓. 在洪川面 決隱里 寺洞 子坐. 大憲柳穡 撰墓碣銘. 강원도지

 

 

출처  백승호 벌력 콘텐츠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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