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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의 과거를 만나다 홍천읍지(洪川邑誌)

용석춘 기자 | 기사입력 2021/01/03 [13:10]

홍천의 과거를 만나다 홍천읍지(洪川邑誌)

용석춘 기자 | 입력 : 2021/01/03 [13:10]

 洪川邑誌(홍천읍지) 

 홍천의 과거를 만나다

 

 


 

홍천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아는 방법은 무엇일까? 홍천군청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최신의 정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홍천의 역사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민국의 역사야 중, 고등학교 때 배운 것도 있고, 사극도 제법 있고, 서적도 나와 있지만 홍천의 역사는 고작 동네 어르신들에게 흘려들은 귀동냥이 전부다. “근거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옛날부터 내려온 얘기여!”가 열에 아홉이다. 한발 더 나가면 ‘버릇없음’이다.

 

홍천의 역사는 ‘홍천읍지(邑誌)’에 모여 있다. ‘읍지(邑誌)’는 한자(邑 : 고을 읍, 誌 : 기록할지) 그대로 고을에 대한 기록이다. 고을이 현(縣)이면 현지(縣誌), 군이면 군지(郡誌)다. 모두 읍지다. 읍지가 모여 『세종실록지리지』가 되고, 『동국여지승람』이 되고, 『강원도지』가 된다. 읍지가 기본이다.

 

‘홍천(洪川)’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지 1천 년이 넘었다. 그 이전 이름은 녹효(綠驍)였고, 본래 이름은 벌력천현(伐力川縣)이었으며, 신라시대 화산(花山)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모두 홍천읍지 기록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조선 초기 읍지를 만든 목적은 통치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 지역을 알아야 통치가 가능했다. 그래서 출발은 중앙정부다. 세종은 1424년에 각 지방의 읍지를 작성해서 제출할 것을 명한다. 기술할 구체적인 항목까지도 정해서 지방 수령에게 내려 보냈다. 그렇게 작성된 읍지가 모여 완성된 조선 최초의 지리지가 『신찬팔도지리지』이다. 1432년에 완성됐다. 안타깝게도 『신찬팔도지리지』는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다. 유일하게 『경상도지리지』만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신찬팔도지리지』에 몇 가지를 추가해 만든 전국 읍지 모읍집이 『세종실록지리지』다. 1454년에 만들어졌다. 여기에 홍천에 관한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지명에 관한 이력과 동서남북 주변 현과의 방향과 거리, 가구 수와 인구는 얼마인지. 군사는 얼마인지. 어느 성씨가 사는지, 밭과 논은 얼마인지, 어떤 토산물이 나는지, 역(驛)은 어디에 있는지를 상세하게 적었다. 약 600년 전에도 인삼이 홍천의 특산물이었음을 『세종실록지리지』가 귀뜸해 준다.

 

뒤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동국여지지 1656』, 『여지도서 1757 ~ 1765』, 『홍천현읍지 1765 이후 추정』, 『관동지 1829 ~ 1831』, 『대동지지 1861 ~ 1866』, 『관동읍지 1871』, 『화산현지 1874~1875 추정』, 『홍천현 읍지 백운정사 필사본. 1890~1892 추정』, 『홍천군읍지 1899』, 『강원도지 1941』 그리고 연대 미상의 『홍천현지』 등의 홍천읍지가 만들어졌다. 이 외에도 홍천읍지가 더 있겠지만 찾지 못했다.

 

홍천에 수군(해군)이 있었고. 홍천 안에 특별자치구인 사이암장이 있었고, 남면의 옛 이름이 검의산면, 금물산면이고, 팔봉산의 옛 이름이 감물악이고, 학명루와 범파정이 있었고, 대미산성의 둘레가 2,197척이었고, 고구려 벌력천이었을 때 고을의 중심은 삼정포, 지금의 화촌면 내삼포리, 외삼포리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홍천 현감 중 누가 인사고과가 낮아 현감 자리에서 물러났는지, 권력 남용을 한 현감은 누구인지, 암행에 걸려 물러나야 했던 현감까지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도 적었다. 조선시대 현감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현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시묘살이 때문이었다. 시묘살이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는 일을 말한다.

 

당시 기록 매체가 오직 한문이었기에 모두 한문으로 쓰여 있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에게 장벽이 높다. 몇몇 읍지가 번역되어 있지만, 난해한 부분이 많다. 더더욱 13개의 홍천읍지를 비교하면서 보기는 쉽지 않다.

 

되도록 청소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다.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고유명사나 단위 등은 뒤에 설명을 달았다. 한문은 원칙적으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지만, 가독성을 위해 띄어쓰기를 했다. 가능하면 원문에 쓰여 있는 한자로 옮겼지만 일부 디지털 기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옛 한자는 같은 뜻을 가진 한자로 대체했다.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의 역사 이야기’는 13개의 홍천읍지만을 대상으로 비교 분석해 정리한 내용이다. 따라서 홍천의 역사 전반에 걸친 내용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그것도 홍천읍지에 기록된 내용에 국한된다. 필요에 따라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등 연관기록을 찾아봤다.

 

출처  백승호  벌력 콘텐츠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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