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살롱
루터, 말의 기적
송병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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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2 [18:1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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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마틴 루터(1483-1546)가 첫 걸음을 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는 포스터를 보면 붉은 바탕 위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가 선명하다. 종교개혁에서 루터의 말이 얼마나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지 짐작할 만하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시킨 장본인이며, 동시에 그 역시 숱한 말을 남긴 당사자이다. 


루터가 한 가장 유명한 말은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정문에 내 건 대자보를 통해 전달되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를 향해 각을 세웠던 물음들, 곧 ‘95개 논제’이다. 1517년 10월 31일 만성절(萬聖節), 이른바 ‘모든 성인의 날’ 전야에 다만 문자로 적은 그의 말은 삽시간에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듯 흩어졌다. 루터가 제기한 말들은 당시 어둠의 시대를 난타하여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와 같았다.

  ‘95개 논제’ 중 제1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였다. 루터가 제기한 문제는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사 중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 내렸다. 단지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닌, 면죄부 판매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뜨거운 도발이었다.

마침내 1521년 1월, 교황에게 파문당한 루터는 그해 4월 황제 카를 5세의 소환을 받아 보름스 제국의회로 갔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지붕 위에 있는 기왓장의 수만큼이나 많은 마귀들’로 비유하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결연히 맞섰다. “지옥의 모든 문들과 하늘의 모든 권세들이 막으려고 할지라도... 거기서 우리의 사명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루터는 황제 앞에서 담대히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루터의 항변은 중세의 문을 닫은 세기적 고백이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역사가들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가 한 말을 가리켜 ‘두려움 없는 최고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였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보름스의 루터 광장에 청동으로 만든 한 켤레의 커다란 신발이 새로 놓였다. ‘루터의 커다란 신’인데, 그가 내딛은 종교개혁의 위대한 큰 걸음을 상징화한 것이다.
 
당시 루터가 참석한 보름스 제국의회를 기념하여 그 현장에 루터 광장을 조성하였다. 1868년 리첼이 만든 종교개혁자 동상 군(群)은 루터를 중심으로 사방에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 존 위클리프(1320-1384), 12세기 말 프랑스 발도파를 일으킨 페트루스 발데스(1184-1218),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1372-1415), 이탈리아 도미니크회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1452-1498)가 앉아 있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로, 사뭇 루터의 말을 보장하고 행동을 옹위하는 듯하다.
 
루터와 동시대의 개혁 동지들인 작센의 프리드리히(1463-1525) 선(選)제후, 헤센의 영주 필립 백작(1504-1567), 독일의 인문학자 로이힐린(1455-1522), 루터의 가장 가까운 동료 멜란히톤(1497-1560) 네 사람은 루터와 사각 지점에서 비슷한 높이로 우뚝 서 있다. 한복판에서 성경을 펴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 루터 상 아래에 그의 말이 새겨져 있다. “주님, 나는 여기 서 있고, 다른 일은 할 수 없나이다.”
 
황제를 선출하는 5인의 제후 중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는 보름스로부터 아이제나흐의 철옹성(城) 바르트부르크로 루터를 빼돌렸다. 신변보장을 받았으나 보름스에는 루터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얼마든지 있었다. ‘기다림의 성’이란 뜻을 가진 이곳에서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11주 만에 독일어로 옮겼다. 번역에 몰두한 ‘루터의 방’(Luther Stube)은 여전히 루터를 기억하고 있다.
 
루터 성경은 “고해성사를 하라”라고 번역된 라틴어 성경의 한 구절(마 3:2)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로 번역하였다. 회개는 ‘95개 논제’에서 주장했듯이 사제가 아닌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사건이어야 한다. 1522년 9월에 출간되어 ‘9월의 성서’라고 불리는 독일어 신약성경은 루카스 크라나흐와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도 담겨있는데, 두 달 만에 무려 5,000부가 팔렸다. 루터가 “인쇄술, 그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최대의 은총이다”라고 언급할만하다. 종교개혁은 말과 글 그리고 인쇄의 발전으로 확장된 소통의 기적이었다.
 
10개월 간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한 루터는 성의 망루에서 튀링겐의 검은 숲을 바라보면서 ‘내 주는 강한 성’을 흥얼거렸을 것이다. 끊임없이 “너 혼자만 옳은 거냐?”며 되뇌었던 루터는 말 이전에 깊은 묵상의 사람이었다. 순간순간, 단호히 자기의 입장을 고집했던 루터였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연약한 존재였다. 그 약함이 암흑의 시대와 교회의 금기를 깨뜨렸다.
 
 
루터의 말은 루터의 도시들과 기념물 어디에든 새겨져있다. 비텐베르크 광장 가운데 멜랑히톤과 나란히 서 있는 루터 상 아래 기록된 말은 “복음을 믿어라. 내 주는 견고한 성이다”였다. 그는 손에 종교개혁의 대표적 브랜드인 성경을 들고 있다. 가까이 루터하우스에 있는 아내 카타리나 동상에도 루터의 말이 적혀 있다. “나는 나의 케테를 프랑스와도, 베니스와도 바꾸지 않으리라.”
 
루터는 죽을 때까지 말과 말을 남겼다. 루터는 “우리는 거지이다. 이 말은 참되다”(Wir sind Bettler, das ist wahr)라는 유언하였다. 루터가 남긴 말들은 말의 홍수 속에서 말다운 말을 찾기 어려운 오늘의 교회를 향해 웅변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언어가 된 그의 말이 ‘태초의 말’처럼 평가받는 이유다. 귀 있는 자가 들었던 말의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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