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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언우의 홍천학 2] 고고자료로 본 홍천강유역 원삼국·삼국시대의 고대문화(1)

홍천 역내리, 철정리유적 중심...홍천강 흐름과 같은 괘

용석준 기자 | 기사입력 2023/05/07 [09:09]

[동언우의 홍천학 2] 고고자료로 본 홍천강유역 원삼국·삼국시대의 고대문화(1)

홍천 역내리, 철정리유적 중심...홍천강 흐름과 같은 괘

용석준 기자 | 입력 : 2023/05/07 [09:09]

  © <그림1-1>역내리고분 7호분 당식 청동대금구/ 국립춘천박물관 복원도


Ⅰ. 머리말

 

이 글은 고고자료를 통하여 홍천강 유역에 자리 잡았던 원삼국시대·삼국시대로 편년되는 유적을 중심으로 그 지역의 문화상을 살피고 이를 통해 고대 홍천지역의 문화 전개와 정착과정을 검토하여 홍천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물론 역사의 주체와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물질만 남아 있는 고고자료를 토대로 지역의 문화상을 추정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특히 전문 영역의 연구자가 아닌 향토사를 공부하는 학생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지만 본고에서 논하는 유적에 관한 발굴조사보고서, 논문, 학술지, 보고서 등을 검토하여 홍천강 유역의 고대문화 속에서 홍천 문화의 출발지와 전개과정을 확인하고 영서지방에서 홍천의 위치 및 문화상을 검토했다.

 

고대 홍천의 문화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지금까지 확인된 원삼국시대의 생활유적으로 전개한다면, 홍천 철정리Ⅱ유적(AD 2~3세기)⟶홍천 성산리유적(AD 2세기 중반~4세기)⟶홍천 하화계리유적(AD 3~4세기)의 순서로 시간적인 흐름을 보이는데, 유적의 위치를 볼 때, 홍천강 상류에 위치한 홍천 역내리·철정리(Ⅱ)유적⟶중류에 위치한 성산리유적⟶중 하류에 위치한 태학리유적⟶하류에 위치한 하화계리유적의 순서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유적의 물질문화가 홍천강의 흐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흐름은 삼국시대 문화의 흐름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사에서 삼국시대는 4세기에서 7세기 후반까지 시기를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이 시기에 삼국 중 어느 한 나라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강원지역의 경우에는 이 시기를 삼국시대로 부르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즉 삼국 중 어느 나라에 속하였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20여 년 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도로 확충 및 지역개발로 인하여 구제발굴에 의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삼국시대 각 국의 진출과 신라 통일기의 양상을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발굴과정의 성과로 한성백제의 영향이 홍천강 유역까지 미쳤다는 것을 홍천 하화계리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와 토기, 그리고 2012년 발굴 조사된 성산리유적에서 한성백제의 주거지와 백제시루가 출토되어 확인할 수 있었고, 고구려의 남진을 보여주는 홍천 역내리고분, 홍천 역내리유적, 홍천 철정리유적에서 고구려 토기와 주거지가 확인되어 고구려의 진출이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홍천강유역 진출과정은 홍천 역내리·홍천 철정리유적 및 고분 부장품과 생활유적에서 확인된다. 이는 홍천강유역과 북한강 상류지역에 삼국 진출과정을 확인해 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고고학 연구자들도 논문을 통해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조용환은 강원지역에서는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된다. 생활유적은 집터 및 생활유구를 포함하는 것으로 영서 지역에서 3곳이 확인된다. 그중 홍천 철정리유적의 2호 도랑형태의 유구에서 고구려 토기 3점이 출토되었고, 홍천 역내리유적 4호 주거지에서 띠 모양이 부착된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다. 마지막으로 원주 건등리에서 고구려 토기가 확인됐다.

 

지현병은 역내리 고분군은 무덤의 축조방식 및 출토유물로 보아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안치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영서지역의 신라화 과정을 역내리 고분을 통해 볼 때 6세기 중후반 경으로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심재연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이 되면 북한강 상류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고구려 주거유적은 홍천강 상류에 위치한 홍천 역내리유적과 철정리 유적이다. 이 일련의 2개의 유적은 매장유적이 아닌 생활유적으로 고구려의 남진과정에서 남겨진 유적으로 당시 고구려의 군사적 측면에 있어 북한강 상류지역 중 홍천강유역의 중요성을 다시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역내리유적에서 조사된 신라주거지는 진흥왕대의 북한강 상류 지역에 대한 진출을 알려 주는 중요한 표식 주거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서영일은 홍천 역내리유적, 홍천 철정리유적에서 나타나는 고구려, 신라의 영향 문제는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삼국의 세력이 교차하고 지역거점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황보경은 홍천 역내리고분은 가평, 춘천을 포함한 북한강유역 에서 가장 많은 고분이 발굴된 곳이며, 앞으로도 많은 고분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같이 고구려, 신라의 북한강 유역 진출과 신라화 과정의 물질자료로써 역내리유적과 철정리유적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은 연구자들은 공통된 의견을 갖고 있다.

 

홍천지역에서 27km 떨어진 홍천강 상류지역에 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백제·고구려·신라의 진출 양상을 알 수 있는 물질 증거가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내리가 포함된 두촌면은 홍천강 하상 등에 노두광체가 있고 전국제일의 철매장량을 갖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홍천현 토산조에 ‘석철은 현의 동쪽 말흘동(末訖洞, 두촌면)에서 난다’로 기록이 되어 있다. 원삼국시대에 이미 철정리유적(AD 2~3)과 성산리유적(AD 2세기 중반~4세기)의 주거지에서 송풍관 편이 영서지방에서 유일하게 출토되었고, 유적에서 출토된 철재 및 노벽 등을 분석하여 철재의 제련원료는 사철이 아닌 철광석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역내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당식 청동 대금구<그림1-1> 2구와 성산리유적 주거지에서 출토된 대금구 1구는 영서지방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고고자료이며, 대금구는 관복을 장식하는 관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관료의 상징으로 피장자의 위계나 신분을 규정하는 물질 자료이다.

 

여러 지역을 관장할 수 있는 관인을 상징하는 청동대금구가 홍천 지역이 아니라 홍천에서 27km 떨어진 홍천강 상류에 위치한 역내리 유적에서 출토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필자는 원삼국시대 철정리유적과 성산리유적에서 철광석을 이용해 철생산이 이루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는 송풍관 편이 출토된 사례와 5~6세기 백제·고구려·신라의 홍천강 상류 진출, 그리고 역내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2구의 청동 대금구 등 이러한 사항들은 철 생산지 확보 및 철의 유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토대로 조사했다.

 

 

  © <그림1-2> 7호고분 인문화토기(AD650~700)


홍천강 상류 유역에 위치한 역내리, 철정리유적에서 나타나는 고구려, 신라시대의 생활유적과 매장유적은 신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적극적 문화상이 나타난다. 횡혈식석실묘, 횡구식석실묘의 축조, 착장용 위세품인 당식 청동대금구와 왕경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와 비견(比肩)되는 화려한 인화문토기<그림1-2>, 철제무기와 농업용 철기구 등의 물질자료는 당시의 문화상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이며 신라 중앙과의 문화교류가 원활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경제적 생활상을 판단할 수 있는 고고자료이다.

 

재지세력(在地勢力)의 새로운 경제적 기반은 신라화 된 토기의 유통이었다고 판단된다. 6~7세기로 편년되는 인화문토기는 재지세력이 소유하고 있던 토기 생산시설에 신라식 기술이 수용됨으로써 이 지역의 생산품으로 통일되는데 이를 통해 신라문화가 정착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화려한 신라토기는 두촌(역내리, 철정리), 화촌(성산리)지역뿐만 아니라 이 외의 지역까지 예전부터 형성된 교통로를 따라 유통 되었을 것이라 추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고고자료로써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의 문화의 양상을 종합해 보면, 기원후 2세기에서 7세기말 까지 홍천지역 문화를 선도한 지역은 현재 홍천지역이 아니라 홍천강 상류에 위치한 두촌지역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역내리유적과 철정리유적에서 조사된 고고자료를 통하여 삼국의 홍천강 상류 진출 목적과 정착과정을 알아보고 고구려계로 예상되는 재지세력의 생활문화가 신라의 중앙문화를 수용하며 변화되는 과정과 정착과정을 검토하여 홍천지역의 역사적 문화의 정체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참고로 역내리, 철정리를 벌력천정의 소재지일 가능성과 물걸리 절터에 있던 사찰이 벌력천정을 종교적으로 후원했을 가능성을 제시한 연구자도 있다. 

 

필자는 홍천강 유역 원삼국~삼국시대의 고대문화에 대한 논문을 3편으로 구성할 예정이다. 1편은 역내리유적과 철정리유적, 2편은 성산리유적과 물걸리사지·벌력천정, 3편은 홍천의 태학리·신장대리·하화계리유적으로 구분하여 검토할 예정이다. 물걸리사지·벌력천정·성산리유적에 관한 연계성은 2편 성산리유적에서 검토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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