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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마을 서낭당제와 덕탄수레바위 전설

용형선 기자 | 기사입력 2022/08/03 [04:48]

서곡마을 서낭당제와 덕탄수레바위 전설

용형선 기자 | 입력 : 2022/08/03 [04:48]

 

 

내촌면 향기나는 서곡마을은 매년 4월 덕탄수레바위 일원에서 기관단체장 및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삼짇날 서곡마을 서낭당제를 개최한다서곡마을은 원주민의 좋은 문화와 새주민의 좋은 문화를 합하여 새로운 농촌 문화를 만들어 더불어 살기 좋은 서곡마을을 만들기 위해 사낭당제를 지내고 있다.

 

 

[덕탄 계곡]

 

 

서곡리에 있는 덕탄계곡을 찾은 많은 묵객들이 흐르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위치와 물의 양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바위 때문에 마음이 너그러워 고매해 진다고 해서 계곡을 덕탄이라고 했다여울()의 이름에다 ()’을 얹은 곳답게기기묘묘한 순백의 바위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이 울창한 소나무와 어우러져 선경을 빚어내는 곳이다

 

덕탄은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유원지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었으나하류에 상수도 취수장이 들어서고 상수도보호권장구역이 되면서 물놀이가 금지되고 유원지가 폐쇄돼 잊힌 곳이다그 덕에 덕탄의 경관은 오롯이 살아남았다지금도 서곡마을을 흘러내리는 덕탄 일대에서는 물놀이를 할 수 없지만내촌천의 반짝이는 물길을 따라 생태탐방로가 놓였다탐방로를 따라 덕탄의 여울을 따라 걷거나 초록의 마을 풍경이 고요하게 수면에 찍히는 물가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덕탄(德灘)’은 물과 바위가 어우러져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옛날부터 풍류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그곳에는 샘밭 부잣집과 덕탄 수레바위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덕탄 수레바위 전경 - 올려 놓은 짐바위와 내려 놓은 짐바위]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 서일 마을에 본관이 동래인 정 대감이라 불리는 어마어마한 부자 집이 살고 있었는데 수많은 식객들이 날마다 들끓었기에 이 식객들을 대접하느라고 엄청난 량의 쌀을 씻어 그 뿌연 뜨물이 사∼오 리 정도나 떨어진 가사거리까지 흘러가 도랑이 마를 날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그렇게 손님으로 북적대는 나날이 반복되면서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식객이 늘어나고 있어 손님 접대에 지쳐가던 안주인들과 머슴들이 내심 못마땅해 함은 물론아예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날이 계속되고 있던 어느 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님 한 분이 하룻밤을 묵고 가는데 주인마님은 스님에게 시주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식객들이 줄어들겠느냐고 방법을 알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더 많은 시주를 했다그 후 안주인은 그 스님이 가르쳐 준 대로 정 대감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아주 천천히 몇 달에 걸쳐 머슴들을 시켜 집 옆의 큰 샘을 잔돌로 반만 채우라고 했는데 가득 채워 메워 버리는가 하면덕탄강가에서 수레바위를 찾아내 그 수레에 실려 있던 커다란 바위를 아래쪽으로 조금만 옮겨 놓으라고 했는데 머슴들은 강물 속으로 밀어 떨어뜨려 버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말로 정 대감댁엔 해가 갈수록 식객이 점점 줄어들자 그제야 안주인들과 머슴들은 편해져 즐거워했다그런데 이를 어쩌랴식객이 줄어들면서 가세도 점차 기울어져 갔는데 서일마을의 정 대감 댁 뿐만 아니라 막고개 너머 여창에서 떵떵거리고 살던 동생마저도 망해 가면서 어느덧 정가네 터란 지명마저 세월 따라 희미해져 갔다그런데 그 정대감댁 문중만 망한 것이 아니라 서일마을 주민 모두가 함께 가세가 기울어져 우환이 빈번하고 호환마저 이어지는 등으로 점점 마을이 황폐 해져 갔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마을을 지나면서 이 마을이 큰일 났다고 하면서 마을 주민이 병마에서 벗어나고 동네가 발전하려면 샘말의 우물을 다시 파서 먹고덕탄에 있는 수레바위가 빈 수레로 있는데 짐을 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갔다동네사람들은 늦게 깨 닳고 우물을 발견하고 원상복구를 했지만 옛날처럼 물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또 강물에 밀어 떨어뜨렸던 큰 바위를 찾고 또 찾았으나 너무도 세월이 많이 흐른 탓으로 도저히 그 바위를 찾을 수가 없게 되자 주변에서 큼지막한 바위를 찾아 잘 다듬어 수레바위에 실어 주었는데……과연 마을에는 다시 복되고 상서로운 일만 일어나게 되어 조선 영조 때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는 절골여창를 병합하여 상서로울 서()자 서일마을이라 명명하였는데마을 이름이 서곡대사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상서롭고 복된 일만 지속되라는 의미로 상서로울 瑞고을 谷자를 써 瑞谷서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서곡마을이란 마을 이름에 걸맞게 마을은 유구한 역사의 변천과 난관즉 조선이 망하고 일제 36년 치하를 거쳐 6·25동란 등의 난리 속에서도 주민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오고 있었다. 1950년대 초반 당시 한국전쟁을 겪는 등으로 우리나라 국민 평균 수명이 42세에 불과했음에도 서곡마을에는 환갑잔치를 하는 분들이 꽤 많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평온하고 주민이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데좋은 일에는 꼭 마가 낀다는 옛말이 있듯이 한국전쟁 휴전 직후 어수선한 틈을 타서 1955년 가을경 누군가가 수레바위에 실려 있던 큰 바위를 또 다시 강물 속으로 떠밀어 버려 빈 수레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그 큰 바위를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치워버릴 수 없음을 감안분명히 덕탄강에 소풍 왔던 자들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마을 청년들이 수소문한 결과 물걸리 동창 동네 청년들이 왔다갔음을 확인하고 동창마을로 찾아가 추궁하였으나 끝내 오리발을 고수하여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어 한동안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1956년 설날을 맞아 서곡마을 처가에 세배 왔던 동창 거주 새 사위가 결국 자신이 한 짓이고 조만간 크게 사과하고 원상 복구하겠다고 다짐했으니 그 사연인즉슨 서곡마을에 이천 서 씨인 훈장이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남매 중에 아들은 전쟁에 참여 했다가 전사하고서윤숙이란 딸은 혼기가 꽉 차 있어 휴전 직후부터 여기저기서 중매가 쇄도하고 있었다이목구비가 반듯하고피부가 박 속같이 희어 중국의 양귀비나 서시 같은 미녀들이 울고 갈 만큼 아름다웠는데그 미모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면 동구 밖에 서있는 천하대장군 장승이 나들이 나선 그녀의 자태에 홀려 곁눈질을 하다가 짝꿍인 지하여장군에게 혼찌검을 당했다는 쑥덕공론이 이웃 마을까지 왁자지껄할 정도였기에 동창 마을에서도 매파가 빈번하게 오가던 중동창마을 서당 학생들이 가을 소풍을 맞아 서곡마을의 그 소문난 처녀의 미색에 이끌려 서곡 서당 어르신께 인사 방문을 핑계로 소풍 장소를 덕탄강으로 정하고 소풍을 덕탄으로 갔었다.

  

[아래와 옆에서 보일 수 있도록 새겨 놓은 재차 병신 입33(載車 丙申 立三三)]

 

그런데 막상 덕탄강에 임하여 자기네들끼리 농주를 마시면서 서로의 속내를 탐색해 보니 거의 모두가 그 처녀를 탐내고 있었다는 것을 안 청년들은 힘겨루기로 그 여자와 결혼하기로 합의 하였었다힘겨루기는 수레바위에 실려 있는 큰 바위를 강물로 밀어 내는 자가 서곡마을 미녀에게 장가들기로 결론을 내리고 수레바위에 실려 있는 바위를 강으로 밀어내기를 했다청년 중에 지금 훈장님의 사위인 청년이 밀어내어 결국 장가를 들게 되어 사위가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그 사위는 서곡마을 청년들의 추궁에 선뜻 나서서 자신이 한 짓임을 차마 고백하기가 힘들어 고민만 하고 있던 중 서곡마을에서 시집온 미녀 아내가 그 수레바위에 짐이 없어지면 처가 마을이 황폐해져 가는데 뭘 망설이느냐당장 이실직고하고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난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고향 동네 발전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자결국 동료들과 함께 서곡 마을에 잔치를 베풀면서 크게 사과하고 석공을 동원하여 큰 바위를 직사각형으로 예쁘게 다듬어 실을載 수레車, ‘載車라 새겨서 수레바위에 실어 놓았으나수레바위의 글자가 윗면에 쓰여 있어서 아래와 옆에서는 이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며 다시 해 놓으라는 서곡마을 청년들의 요구에더 큰 바위(약 450)에 글자를 새겨서 수레바위에 있던 바위는 아래에 내려놓고 다시 만들고 글자를 새긴 바위를 올려 짐을 실어 놓았는데아래와 옆에서도 볼 수 있도록 丙申 三三 立 載車라 새겨서 실어 놓았다

수레바위는 서곡마을이 더 큰 발전을 향해 약진하게 되는 정신적 원동력이 되고 있다마을의 발전과 평온을 한 결같이 기원하는 애향심이 얼마나 투철한가를 가름하게 하는 아주 귀하게 간직해야 할 값진 전설이라 하겠다.

 

[서곡마을 서낭당제]

 

향기나는서곡마을에서는 덕탄계곡에 있는 수레바위가 서곡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건강을 지켜 주고 마을의 번영을 향상시켜주는 것으로 밑으면서 수레바위 전설 보존을 위한 를 매년 음력으로 3월 3일 삼짇날 주민화합으로 올리고 있다

덕탄계곡의 수레바위는 대폭팔로 우주와 땅덩어리가 생길 때 백우산도 생겼을 텐데 백우산(白羽山, 895m, 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형태의 산)의 산신령이 서곡마을에 가면 덕탄이란 명승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하루는 소문이 나 있는 서곡마을 덕탄계곡으로 소풍을 와보니 수많은 바위들이 있는데 그 기기묘묘한 모양이 절경이었다여기에 백우산에 있는 바위도 가져다 놓아야 갰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수레바위를 타고 덕탄계곡에 와서 어떻게 생긴 바위를 가져다 놓을까를 생각하다가 타고 온 수레바위는 그대로 놔두고 백우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그 후 타고 온 수레바위는 산신령이 백우산으로 가니 빈 수레가 되었다서곡마을 주민들은 빈 수레가 되지 않도록 큰 바위를 실어 놓았다. 

 

[서곡리 마을공원에 있는 덕탄수레바위 모형]

 

또 근래에 와서는 덕탄계곡에 있는 수레바위가 백우산을 그리워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상징하는 뜻으로 수레바위를 조각으로 만들어 가족공원에 2019.12.14 설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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