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기억이다. 당시 흔하진 않았지만 우리 집에 단골 거지가 있었다. 아침식전에 대문을 두드리는 인기척에 깨보면 거지가 대문을 두드리곤 한다. 동냥하러 온 것이다. 거지는 대문 옆에 심겨진 넓은 오동나무에 등 기대고 있다 밥 때가 되면 어김없이 문을 두드리고 밥을 얻어간다. 그러나 결코 공짜 밥은 아니다. 밥을 빌어먹기는 하나 그 거지는 오동나무 옆에 있던 싸리 빗자루로 골목길을 훤하게 쓸고 간다. 아침 등교할 때 보면 넓은 오동나무 잎이 한 곳에 수북이 쌓여있는 모습을 본다. 거지가 밥값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를 거지라 부르지 않았다. 그냥 아침손님이다.
보통 거지는 받는 것에 익숙해 남에게 베풀거나 주는 입장이 아니다. 그런데 거지가 밥값을 한 것은 거지답지 못한 행동이다. 우리는 이런 거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러나 거지도 밥값을 하는데 밥값도 못하는 거지같은 사회저명인사들이 너무나 많다. 필자는 그들을 '거지근성'을 가진 자로 분류한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그들의 이면에서 거지근성을 발견할 때 우리 사회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원론적으로 거지는 남에게 빌어먹고 사는 사람을 말하고 근성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기질을 말한다. 근성은 ‘곤조’라는 일본어 표현이 오히려 익숙하다. ‘에이, 거지같은 놈’, ‘저놈 거지근성 좀 봐’ ‘저거 노예근성 아냐?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거지근성을 가진 자들을 선거판에서 많이 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선거라는 매개체로 거지근성을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예가 토사구팽이다. 신뢰로 만나 도원결의를 하나 결국 자신이 원하는 고지를 점령했을 때는 과감한 도륙이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라 판단하고 배신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우리는 성완종리스트에서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다. 배은망덕한 사회는 온전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이런 거지같은 거지근성을 가진 자들의 대부분은 과거 지독한 콤플렉스를 가진 자들이 많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이곳, 저곳에 다릴 놓고 가랑이를 벌려 놓는다. 이들의 거지근성은 시대가 바뀌고 주객이 바뀔때 드러난다. 거지라는 외형은 근성이라는 내면에서 오는 현상이다. 겉은 멀쩡해도 거지근성이 있기 때문에 거지인생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거지에게 왕자의 옷을 입혀서 왕궁에 살게 하고 왕자의 자리에 앉혀서 표면적으로 왕자를 만들어도 그는 거지인생의 삶을 산다. 떳떳하지 못하다. 물론 그 사람이 거지근성을 가진 자인지는 금방 알 수 없다. 겉모습만 보고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의 탈을 쓴 이리’라는 말이 있다. 겉모습은 양이지만 속은 이리라는 것이다. 일하라고 뽑아 준 시간에 각종 행사장에 발품을 주며 빠짐없이 메인사진에 오르는 단골인사들이 있다. 거의 고정멤버다. 행사의 주체가 아닌 자들이 행사에 기웃되는 것이 거지같은 거지근성이다. 들러리로 서있으라고 그 직분을 부여한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런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거지근성을 가진 가장 저질스런 인간들에게 지배당하고 싶지 않은가? , . . .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 선거 때가 다가온다. 용석춘 홍천뉴스투데이편집국장 <저작권자 ⓒ 홍천뉴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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