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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표창원...그리고 예술과 정치

김양수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1/25 [19:27]

박근혜와 표창원...그리고 예술과 정치

김양수 칼럼니스트 | 입력 : 2017/01/25 [19:27]

[신문고 뉴스]김양수 칼럼니스트 = 나는 ‘실패한 문학소년’이다. 어린 시절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재능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은 미약했고, 좋아하는 일에 신명을 바칠 열정도 뜨겁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나에겐 보장 없는 미래의 꿈을 쫓아갈 용기가 없었다.

 

지금도 취미나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에게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자, 궁금증의 대상이기도 하다. 취미와 생업의 일치는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나의 ‘문학 영웅’은 윤동주와 쌩떽쥐베리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글쓰기와 일치된 치열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문학과 합치된 순일했던 삶. 그들에게 더 이상의 찬사는 필요 없으리라.

    

정치와 만난 문학...한국의 근현대문학은 부끄럽게도 저항보다는 친일 부역으로 얼룩져 있다. 이광수, 서정주 등 문학사에 주옥같은 발자취를 남긴 작가들의 생애는 저들이 과연 이토록 아름다운 글을 남긴 작가가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친일부역으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다.

 

서정주는 친일도 모자라 전두환 독재에 대한 부역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말종(末種) 글쟁이였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와 서정주의 시를 읽을 때, 누구나 그들의 삶을 아는 사람이라면 순수한 사랑이 담긴 연서(戀書)와 전문작가의 대필로 쓰인 ‘작업용 멘트 글’의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술은 다만 예술이고 사람은 그저 사람일 뿐이라는 명제에 공감하기에, 깔끔하지 못한 사생활로 얼룩진 가수 조영남의 노래 듣기를 좋아하고, 불나방처럼 권력 주변을 맴돌았던 배우 이순재 최불암 강부자 유인촌 이덕화 등의 연기도 인정한다. 물론 그들의 예술을 즐기려면 그들의 추태를 모르쇠 하는 자기최면이 반드시 필요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 서글픈 모순과 부조리의 근원은 어디일까. 그것은 혹시 정치와 예술의 잘못된 만남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정치는 이념 선전의 도구로써 예술을 필요로 한다. 예술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전달의 도구로써 정치(혹은 권력)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부역 예술가들은 권력에 굴복한 희생자일 수도 있고, 권력을 예술적 입신양명의 도구로 이용한 기회주의자들일 수도 있다.

 

박근혜 일당이 문화계를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로의 분류를 통해 돈과 권력으로 반대자들은 억압하고 찬양예술인들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했듯, 권력이 사악한 폭력성을 띌수록 예술과의 ‘잘못된 만남’을 갈망하는 경향 또한 비례하여 커지곤 한다. 그런데 정말로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잘못된 만남의 결과로 파멸하는 쪽은 권력보다 예술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국회의원 표창원이 주최한 ‘곧 Bye’ 전시회에서 ‘더러운 잠’이라는 패러디 작품으로 인한 파문이 일파만파로 커져가고 있다. 나는 일단 패러디 작품 ‘더러운 잠’ 은 패러디 예술작품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박근혜를 지탄하려다 여성비하가 되었을 수도 있고, 고상치 못하고 생경하기만 한 ‘B급 아트’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파문에서 우리가 그토록 강조했던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적 관점에서 볼 때, ‘더러운 잠’이 패러디 예술품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부정될 수 없다.

 

▲ 박근혜 최순실의 얼굴을 합성하며 만든 더러운 잠의 원본 그림...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   

 

박근혜를 지탄하는 사람들이 마주했을 때 통쾌하고 기분 좋으면 스마트폰 배경 화면에 깔아두고 밤이고 낮이고 바라보면 되고, 반대편이면 보기 싫으면 안보고, 역겨우니 신랄하게 비평하면 그만이다.

    

문제의 핵심은 ‘더러운 잠’ 파문 또한 그 전시 장소가 정치의 장인 국회, 주최자가 정치인인 국회의원 표창원으로서 예술과 정치의 잘못된 만남의 결과라는 점이다.

 

대중적 인기를 밑천으로 아주 쉽게 정치판에 데뷔하여 노이즈 마케팅을 정치 마케팅의 전부라 착각하는 얼치기 초짜 정치꾼 표창원이(그의 노이즈 마케팅 전력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국회의원 회관에서 이런 전시회를 기획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표현의 자유에는 한계가 없다.’는 순수함에서 비롯되었든, 박근혜 정권과 최순실 일당에 대한 분노와 혐오감을 가일층 부채질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되었든 상관없이 예술을 정치의 진흙탕으로 처박은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가 되었다.

 

게다가 표창원을 픽업하여 정치판에 ‘꽂아준’ 문재인 마저 등을 돌렸듯, 표창원이 혹시라도 가졌을지 모를 순수한 의도를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가운데, ‘더러운 잠’을 둘러싼 시시비비 논쟁은 표창원이 기대했을지도 모를 정치적 이익과 오히려 정반대로 치닫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촛불정국 초기, 민주당 우상호는 방송 인터뷰에서 ‘광장은 광장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또 국회는 국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한다고 하는 그러한 고민이 있습니다.’ 라는 궤변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의 본심은 ‘민중의 위험한 선동에 휘말려 소중한 우리들이 엮여서 역풍이라도 맞으면 끝장이다’ 라는 조바심이었을 것이다. 물론 우상호의 궤변이 100% 틀린 말은 아니다. 국회가, 정치를 담당하는 주체가 무조건적으로 광장의 외침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광장의 목소리를 어떻게 정치에  담아내느냐의 모범 답안은 김대중이 이미 제시했다. ‘반보론’이다. 내가 우상호의 발언을 궤변으로 단정하는 이유이다. 당시 민주당은 촛불 민심의 반보 앞이 아닌 세 걸음 이상 뒤에 처진 채로 광장의 정치와 의회 정치사이 괴리를 운운했기 때문이다.

 

표창원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최순실 부역으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광장의 정치를 반걸음 앞에서 견인해야 하는 정치인의 소명을 팽개치고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노이즈 마케팅을 위해 광장의 예술을 정치의 추악한 이전투구 쓰레기통으로 처박아 벼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전투구의 결과는 박근혜에 대한 동정론으로 비화되어 박근혜 기사회생의 전기로 작용할 조짐마저 보이는 상황이다.

 

탄핵심판에서 절대적 수세에 몰린 박근혜의 마지막 남은 카드는 사실 ‘동정론’ 밖에 없다. 평생 나라 위해 헌신하느라 가정을 꾸리는 개인의 행복도 포기하고 처녀로 늙어가는 가여운 여인 박근혜, 그리고 그런 여인의 사소한 실수들을 침소봉대하여 범죄로 엮는 음모를 획책하는 종북 좌파 세력....... .

    

동정론을 간판으로 탄핵 위기를 모면하려는 박근헤 일당이 그리는 최선의 대립 구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러운 잠이 불을 댕긴 ‘여성 비하’니 ‘대통령 모독’이니 하는 이슈는 탄핵의 본질을 왜곡하는 최고의 선동 구호로 이용 가능하다. 표창원은 자신의 선한 의도를 내세우며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의는 절대로 무능의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광장의 목소리를 반걸음 앞에서 견인해야 하는 정치적 소명 대신 광장의 예술을 자신의 정치마케팅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예술과 정치의 잘못된 만남을 주저하지 않았던 표창원. 결국 ‘잘못된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표창원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예술을 노예로 부리려던 박근혜와 별로 다르지 않은 부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것도 모자라 표창원의 박근혜 따라 하기가 박근혜의 정치적 재기의 밑거름이 된다면? 표창원은 자기 나름대로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겠다고 언급한 모양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측에서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자 ‘사퇴는 아니다’라고 못을 쳤다.

    

따라서 사퇴 외에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지겠다는 것인지 아리송하지만 그는 여전히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서움을 정말로 모르는 아둔한 인간이거나, 진정성 하나 없이 책임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면해보려는 위선자 중 하나일 것 같다.

    

그렇게 진보를 팔아 영달을 꾀하는 정치꾼들은 넘쳐나지만 진보를 위해 할복의 각오로 책임을 지는 정치인은 없는 게 우리네 야당이다. 그래서다. 무조건, 가차 없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예술, 다시는 정치와 만나지 마라. 정치를 풍자하고 권력을 풍자하는 것은 예술의 본질일 수 있으나 그런 풍자를 정치가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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