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의 계절을 기억하며
한바탕 비바람에 화엄 세계 펼쳐지니
영화로움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네
아직도 꽃은 서너 송이 남았지만
내일 아침이면 색즉시공 깨닫겠지
희미한 향기 아쉬워 섬돌 주변 맴돌고
떨어진 꽃 애처로워 걷던 발 도로 내리네
붉고 푸른 빛깔 속에 미래 훤히 알건만
형형색색 고운 모습 잠시 두 눈 머무네
一番風雨是華嚴 일번풍우시화엄
悟得繁英不久黏 오득번영불구점
今日猶看三四剩 금일유간삼사잉
明朝參破色空兼 명조참파색공겸
香餘黯黯頻巡砌 향여암암빈순체
錦地悄悄止捲簾 금지초초지권렴
紅綠極知來歲事 홍록극지래세사
且留雙眼看洪纖 차류쌍안간홍섬
유만주(兪晩柱, 1755~1788), 『통원고(通園藁)』 「낙화(落花)」
여름도 가을도 저마다의 꽃으로 제철을 뽐내지만 꽃의 계절은 단연코 봄이다. 봄의 개화는 긴 겨울 뒤에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마음을 설레게 하고, 봄의 낙화는 찬란한 영광의 끝에 의연히 물러난다는 점에서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신록이 우거진 여름의 초입에 낙화의 계절을 반추하는 이는 많지 않겠지만 여름의 뒤편으로 조용히 퇴장한 봄을 기억하며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지은이 유만주는 너무 일찍 끝나버린 봄 같은 삶을 살았다. 역사가를 꿈꾸었던 그는 과거엔 번번이 낙방하였고 이렇다 할 명성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삶의 자취를 남기기엔 너무도 이른 서른넷 나이에 훌쩍 세상을 떠났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그는 주변의 아름다움을 온 마음으로 음미하였다. 달과 벗하고 초목을 노래했으며 정원을 사랑했다. 그리고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을 무려 13년의 세월 동안 매일매일 일기로 남겼다.
이 시에서도 일상 속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시인의 따스한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는 낙화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마치 스냅숏처럼 포착하였다. 눈앞에 펼쳐진 꽃비 내리는 풍경은 잠시 이상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한다. 그러나 꽃의 공연이 막을 내리고 찰나의 꿈에서 깨어나면 애잔한 마음이 엄습하는데, 이는 하늘에서 내린 꽃과 땅에 스러진 꽃이 너무도 극명한 대비를 보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아쉬운 마음을 서슴없이 내보인다. 서너 송이 남은 꽃을 보며 잔춘(殘春)과 완전히 이별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끼고, 그 아쉬움은 이내 미련이 되어 꽃향기를 찾아 한없이 서성인다. 맴돌고 맴돌아도 허전함을 견디지 못하여 도로 방으로 들어가 발을 내린 채 애써 외면해 보기도 한다.
붉은 꽃이 푸른 잎으로 바뀌듯,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일이 세상의 이치임을 시인도 모르지 않았다. 내일 아침엔 색즉시공의 이치를 자각하리라 이미 다짐한 그였다. 그럼에도 말미에 시선이 다시 낙화에 머문 것을 보면 시인의 마음은 결국 깨달음보다는 미련이었던 듯하다.
낙화에 아쉬워한 유만주였으나 그 삶의 가장 큰 비극은 신록의 죽음이었다. 낙화 같은 자신의 처지에 수없이 낙담하던 그도 신록 같은 아들이 있었기에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정히도 신록을 먼저 데려갔고 크게 상심한 유만주는 아들이 죽은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죽음에 낙담하기보다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울 삶의 의지를 가졌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질문은 무의미할 듯하다. 어차피 계절은 저마다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오니까. 그저 그의 글 속에서 그가 그린 계절의 향기를 가만히 느껴보는 것만이 지금 우리가 해 봄 직한 일이 아닐까 한다. 인생의 초여름에 삶을 마감한 유만주, 하지만 어쩌면 그의 남은 계절도 이미 그의 봄 속에 모두 함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김효동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