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다.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한다. 산천이 온통 신록으로 물드는 계절이니 여왕이란 말이 나올 법도하다. 그만큼 좋은 계절이다. 해마다 오월이면 '어머니날'이 찾아온다. 유교문화가 가시지 않은 당시 아버지들의 가부장제하에서 어머니의 권위는 인자함과 자상함 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날이 1956년 제정되었으나 차츰 아버지들의 주장이 약화되면서 1973년 어버이날로 지정됐다.
오월에는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부부의 날도 있다. 그래서 오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지난 4월은 과학의 달이고 6월은 애국의 달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달은 잘 모른다. 그러나 가정의 달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가정마다 어린이가 있고 부모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겐 어머니는 세분 계신다. 한분은 하늘을 대신하여 나를 낳아주신 창조의 어머니시고 또 한분은 어린 나를 길러주신 사랑의 어머니시다. 마지막 한분은 나를 사람 되게 가르쳐주신 스승의 어머니이시다.
어머니! 부르기만 하여도 하시던 일을 멈추고 어디서든 달려오실 듯한 그리운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품에 안기고 싶은 포근한 어머니, 지금도 생각하면 나는 어린애처럼 가슴이설레입니다. 어렸을 적에 감기가 걸리려면 몸에 열이 많이 난다.
어머니가 옆에 계시거나 지나갈 때면 치마 바람에 어머니 냄새가 난다. 어머니 냄새가 그렇게도 시원하고 좋았다. 치마폭을 잡고 숨을 깊게 들이 마쉰다.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그 순간은 아픈 것을 모른다. 갓 태어난 애기들한테는 젖 냄새가 난다. 청소년들한테는 풋풋한 냄새가 난다. 아가씨들한테도 싱그러운 냄새가 난다. 노인들에게는 노인 냄새가 난다.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냄새일 게다. 이렇게 성별과 나이 대에 따라 냄새가 독특하고 개인의 체향이 있지만 가장 좋은 냄새는 어머니 냄새다. 어머니 냄새는 누구에게도 맡을 수 없는 냄새다.
그 인자하신 모습을 떠올리면 모든 걸 받아주시고 모든 걸 참으셨던 최고의 사랑이요, 그 어느 정치가보다도 그 어느 장군보다도 하늘아래 가장 위대함의 상징이신 어머니, 인간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단어 한마디는 '어머니' 다. 여아가 자라 소녀가 되고 소녀가 자라 아가씨가 되고 아가씨는 결혼을 하면 엄마가 되고 어머니는 할머니가 된다. 소녀가 아가씨가 되는 과정은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인 면에서 성숙하는 과정이고 엄마에서 할머니가 되는 과정은 노쇠하는 과정이다. 아가씨(女)와 어머니(母)는 무엇이 다를까? 한자의 글자모양을 보면 어미모(母)에는 계집녀(女)에 아래위로 점이 두 개가 있다. 즉 아가씨와 어머니는 젖이 나오고 안 나오고의 차이라는 뜻이다. 이는 어머니가 되면 모성애가 있게 되고 어머니는 자식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두게 되어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헌신과 강한 힘이 나온다는 뜻이다.
어머니는 7-8명의 식구들 모두가 밥상에서 밥을 먹을 때도 부엌쪽 맨 끝자리나 아니면 부엌에서 혼자 먹다 남은 찬밥이나 쉰밥을 물에 씻어 그것도 그릇이 없을 때는 바가지에 담아 잡수셨다.
명절 때도 모든 사람들이 설빔 옷을 입어보고 새 양말, 새신을 신어도 당신 혼자서는 제외셨다. 모두가 따듯한 솜이불 덮고 잠잘 때도 혼자서는 가족들 헤어진 양말을 꿰메시다가 졸려 호롱불에 눈썹이나 머리카락을 태우시는 일도 있다.
여름철이면 닭을 삶아 찹쌀과 삼뿌리, 엄나무, 마늘, 밤 등을 함께 넣고 삼계탕을 끓여 먹는다. 앞다리, 뒷다리, 몸통, 날개는 아버지랑 자식들 주고 당신은 국물 아니면 대가리나 목줄기를 잡수신다. 그러면서 목줄기를 먹으면 목청이 좋아지고 노래를 잘한다고 하시면서 자식들의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합리화시킨 큰 뜻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어머니는 아침을 앞 도랑가에 가서 요강을 비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맑은 물에 세수를 하시고 실모래로 치아를 닦으신다. 당시는 잇병이 나도 값이 싼 무면허(일명 돌파리)의사한테 가서 치아치료하는 정도였다. 제대로 진료나 하셨겠나?
참빗으로 머리를 빗고 동백기름을 바른 다음 외출할 때는 은비녀를 끼우고 은가락지를 손가락에 끼우는 것이 고작이다. 평소에는 구리반지를 끼우셨다. 장에 갈 때는 버선에 코고무신을 신으시면 끝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외출을 했다가 저녁 무렵이 돼도 안돌아오면 동네어귀에 나가 기다리신다. 친할 친(親) 자가 그렇다. 나무 위를 올라가 바라보는 마음이 친할 친(親)자이다. 왜 그때는 어머니는 안 먹는 것도 당연한 줄 알았고 안 입는 것도 당연한 줄 알았고 잠을 안자는 것도 당연한 줄 알았고 모든 걸 주고 모든 걸 참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왜 그때는 그걸 몰랐는지 내 나이 어머니 그 나이 되어 팔순을 바라보니 알아도 후회되고 깨달아도 소용없으니 불효막심할 뿐이다. 용서하소서.
고생만 하신 어머니 思母孝하며 살아야지.
꽃다운 나이에 그 당시 아버지랑 맞선을 한번 봤을까 숙명처럼 받아들여 혼인하셨을 테고 세네살씩 터울 두고 일곱남매 낳고 피난길에 막내를 잃고 육남매를 기르셨다. 산후 몸조리는 제대로 하셨을까?
어젯밤 늦게 주무시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텃밭에 있는 고추, 가지, 호박잎 따서 삶고 찌고 마늘 양념 깨소금 넣고 무쳐 반찬으로 밥상을 차리신다. 덕분에 식구들은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다가 물이 부족하면 동네 10분 정도 걸리는 샘물을 땀을 뻘뻘 흘리시며 한 동우리 머리에 이고 오신다. 모두가 어머니 일이셨고 모두가 당연한 일로만 여겼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는 학급에서 몇 명 안가지고 있는 빨간 책가방을 사주셨다. 고추 팔은 돈으로 사주셨다. 색깔이 빨간색이어서 여자가방 같아서 어린마음에 못마땅해 하였으나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그런데 그땐 아무리 어려도 엄마, 고마워요. 한마디 못했을까? 지금도 후회가 된다.
내가 우동을 처음 먹어 본 것은 6학년 때다. 어머니께서는 당시 수안보 읍내에서 솜틀을 하고 계셨다. 이불솜이나 솜바지저고리 솜을 부드럽게 해주고 돈을 버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먼지가 얼마나 났을까? 그땐 마스크도 없고 수건으로 입을 가리셨다. 그 먼지 그냥 다 마시면서 돈을 버셨다. 그날따라 공부가 끝나고 어머니를 찾아갔더니 중국집에서 우동을 사주셨다. 우동을 한 그릇만 시켜서 나만 먹고 어머니는 나 먹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 처음 먹어보는 우동이라 얼마나 맛있든지 엄마도 먹어보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먹었으니 철이 없어도 한참 못난 나를 꾸짖어본다. 우동값은 꼬기꼬기 접어두었던 속치마속 호주머니에서 꺼내셨다.
옛날 시골 어머니들의 대부분이 하는 일이지만 봄여름에 누에치고 목화를 따서 길쌈하고 콩을 갈아 두부 쑤고, 메주 띄워 장 담그고 한해 걸러 고추장 담그고 가을되면 배추 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실에 꿰어 말리셨다.
술도 못 잡수시는 어머니는 농사지을 때 일꾼들 먹을 술을 담그셨다. 당시는 술감독이 동네왔다는 소문이 나면 밭에서 일하다가도 달려와서 그 무거운 술항아리를 들어 뒷담 넘어 굴속에 감추셨다. 찹쌀을 쪄서 꼬두밥을 지으시고 누룩을 넣어 술 담으시고 노릇하게 익으면 용수나 채로 거르는 과정으로 끝을 낸다.
밭일 하시다가도 저녁때가 되면 먼저 집으로 돌아오신다. 일꾼을 얻어 일할 땐 일꾼들과 식구가 합쳐 스무명은 족한데 절구질로 보리쌀을 찧어 청솔나무로 불을 지핀다. 메운 연기에 눈물을 흘리시며 불을 떼어 저녁을 해대고 늦은 저녁 설겆이는 호야불 희미하게 켜놓고 더듬더듬 거리면서 끝내면 하루 종일 흘린 땀 씻을 데나 있었겠나. 온몸은 말씀 안하셔도 천근만근이셨을 게다.
긴 겨울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날줄을 갈라 베틀위에 걸어놓고 눈물에 졸음 섞어 씨줄 넣어 베를 짠다. 무명한필 다되면 잿물 내려 삶아서 햇볕에 말리기를 수차례 하니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을까!
많은 식구들 옷가지가 한두벌인가? 희미한 등잔불에 바늘귀를 실을 꿰어 잠 오는 무거운 눈 올려 뜨고 꿰매다가 바늘도 매정하지 꾸뻑하고 졸으니 손톱 밑을 찌른다. 졸음은 혼비백산하고 손끝이 얼얼하셨을 게다. 그 많은 옷을 솥에 삶아 빨고 빨랫줄에 걸어 장대로 떠받치고 마른 후엔 잘 접어 발로 밟고 숯불 넣은 다림질이 제대로 될리 없고 어쩌다 하얀 천에 시꺼먼 숯덩이 떨어뜨리면 나무아무타불이다.
옛날엔 사대봉사로 제사지내는 일이 너무 많아 한 달에 한번 꼴이다. 기제사고 명절 때는 사람은 많은데 일할 사람은 거의 없고 당시만 해도 남자들은 상 물리고 술상에 들러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시끌벅적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술상 끝내면 식혜나 곶감 같은 후식이 나오는데 모두가 어머니 몫이다.
밑으로 삼남매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충주시내로 중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 집을 찾으면 뭐라도 해먹이려고 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이셨다. 시내로 나올 때면 간장, 고추장, 짱아찌 등을 한보따리 싸주셨다. 그 정성을 이제야 느낀다.
충주시내학교에 근무할 때는 어머니께서 조카와 함께 내 집에 머무시면서 밥을 해주셨다. 그때 가장 생각나는게 있다. 일을 하시는 동안에도 일을 마친 밤에도 손가락 무릎이 아프다고 하셨는데 왜 그때는 그 말이 내 귀에 안들어 왔는지 지나쳐 버린게 한스럽다. 비싸지도 않은 파스 한장 못사다 드린게 맘이 아프다. 내복 한 벌 제대로 된 것 하나 못 사드리고 한약 한 첩 못해드린 모든 일이 맘 한구석에 남아 나를 옥죄인다. 이보다 못한 불효가 어디 있나?
어머니께서는 고혈압으로 쓰러지셨다. 중풍으로 고생하신지 10년을 넘게 투병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우리 집에 와서도 계셨을 때 집사람이 간병해드렸다. 집사람에게 고맙고 미안한 맘이야 이루 말할 수 있을까? 말로 해야 안다지만 집사람에게 잘 나오지 않아 속으로는 더욱 미안하다.
生前孝는 못해드렸으니 死後孝라도 하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구나. 이제 할 수 있는 思母孝라도 하며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홍 진 복 (전)서울신사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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