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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15] 성씨(姓氏)

성씨와 본관만으로도 그 사람의 신분을 알다

용석춘 기자 | 기사입력 2021/04/12 [15:39]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15] 성씨(姓氏)

성씨와 본관만으로도 그 사람의 신분을 알다

용석춘 기자 | 입력 : 2021/04/12 [15:39]

   "성씨와 본관만으로도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다"

 

▲   홍천동면에 소재한 홍천용씨 사당. 시조는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제작을 총지휘한 용득의 이다.

 


조선 시대 성은 사람을 가늠해 보는 잣대였다. 거기에 본관(本貫)까지 더해지면 그 사람의 집안이나 사회적 신분까지도 유추가 가능했다. 지금이야 많이 사라졌지만 첫 대면에서 본관과 성씨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드러내는 사회가 조선시대였다.

 

조선시대 홍천에는 어느 성씨가 살았을까?

 

이에 대해 홍천읍지는 성씨(姓氏)에 기록을 남겨 놓았다. 성씨(姓氏)는 성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성은 출생의 계통을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칭호다. 女+生으로 이루어진 성(姓)은 여성의 몸을 빌어 태어난 혈통을 말한다. 고대 모계사회에서는 여성만이 성을 가질 수 있었고, 성은 딸에게 대물림되었다. 이후 부계사회로 넘어오면서 남성의 성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천현의 토성은 셋이니 피, 변, 용 씨이다(土姓三 皮, 邊, 龍).’라고 기록했다. 토성(土姓)은 조선 전기 성씨의 한 분류로 고려 시대 이래로 과거(科擧) 또는 서리직을 거친 벼슬을 지낸 성씨를 일컫는다. 즉 양반의 성씨를 말한다. 또한 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토착 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홍천의 대표적인 토착 성씨가 바로 피, 변, 용 씨이다.

 

‘망성은 하나니 석 씨이다(亡姓一 石).’ 망성(亡姓)은 홍천현에 토착해서 살다가 없어진 성을 말한다.

 

‘차성은 신 씨이다(次姓 辛).’ 차성(次姓)은 홍천현에서 문벌이나 지위 등이 버금가는 성을 말한다. 조선 초기 홍천현에 거주하는 신 씨 가문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망래성은 원 씨이다(亡來姓 元).’ 망래성(亡來姓)은 한때 홍천현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나 지금은 없어진 성씨를 말한다.

 

‘속성은 둘이니 허, 최 씨이다. 최 씨는 천녕에서 이주해 왔는데 향리이다(續姓二 許, 崔 川寧來 鄕吏).’ 속성(續姓)은 이전 문서에서 빠진 성을 말한다. 이전 문서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저본인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말하는 듯하다. 천녕은 여주에 있던 현의 옛 이름이다. 향리는 한 고을에서 대물림으로 내려오는 아전을 말한다. 아전은 관에서 일을 보던 중인 계급이다.

 

‘사이암장 속성은 하나이니 석 씨이다(寺伊巖莊 續姓一 石)’. 사이암장은 홍천현에 속해있던 특수한 형태의 행정구역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이암장이 현의 동쪽 110리에 있다(寺伊巖莊 在縣東百十里)고 그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장(莊)은 지배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일종의 장원(莊園)이다. 장은 고려 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있었다. 주로 왕실의 어료지(御料地 : 왕실재정의 토대를 이루는 땅)였다. 장은 군현의 하부 단위 고을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현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홍천현에서는 없어졌지만 사아암장에는 여전히 석 씨가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씨 기록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本縣) 皮 邊 龍 石 辛. 元 來. 許 續. 崔 川寧. (寺伊巖) 石 續.’ 토성 대신 본현을 썼다. 본현 또한 토성과 마찬가지로 홍천을 본관으로 삼은 성씨를 말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토성 피, 변, 용에 석과 신 씨가 추가되었다. 원 씨 성은 래성 즉 외부에서 홍천현으로 이주해 정착한 성씨이다.

 

『여지도서』와 『홍천군읍지』에서는 간결하게 성씨만을 나열했다. ‘皮, 邊, 龍, 石, 辛, 元, 許, 崔’. 『화산현지』와 『홍천현 읍지(백원정사 필사본)』는 『여지도서』 내용에 원 씨가 래성이고, 허 씨가 속성이라는 내용만 추가했다.

 

『홍천현읍지』에서 남궁(南宮) 성씨가 처음 등장한다. ‘皮 邊 龍 石 辛 元 南宮 許 崔’

『관동지』, 『관동읍지』, 『홍천현지』는 『홍천현읍지』와 순서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

 

일제강점기 발행된 『강원도지』에는 ‘세거씨족(世居氏族)’ 항목을 두어 좀 더 다양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본관과 시조 그리고 어느 마을에 주로 거주하는지에 대한 내용도 적었다.

 

홍천 용 씨. 고려 영상 득의의 후손. 동면 좌운리에 살았다(洪川 龍氏. 高麗 領相 得義 后. 居東面 坐雲里).

 

평강 채 씨. 신라 부마 원광의 후손. 서석면 동창리에 살았다(平康 蔡氏. 新羅 駙馬 元光 后. 居瑞石面 東倉里).

 

고령 신 씨. 문검교 성용의 후손. 서면 반곡리에 살았다(高靈 申氏. 文檢校 成用 后. 居西面 盤谷里).

 

함열 남궁 씨. 대장군 원청의 후손. 홍천면 희망리, 동면 월운리에 살았다. 각 리에도 나누어서 살았다(咸悅 南宮氏. 大將軍 元淸 后. 居洪川面 希望里. 東面 月雲里. 分居 各里).

 

해주 최 씨. 문충공 충의 후손. 북방면 구만리와 화촌면 성산리에 살았다(海州 崔氏. 文忠公 冲 后. 居北方面 九巒里. 化村面 城山里).

 

수성 최 씨. 수성 백영규의 후손. 북방면 화계리에 살았다(隋城 崔氏. 隋城 伯永奎 后. 居北方面 花溪里).

 

경주 김 씨. 제숙공 곤의 후손. 북방면 노일리에 살았다(慶州 金氏. 齊肅公 梱 后. 居北方面 魯日里).

 

김해 허 씨. 부사 결의 후손. 좌운리에 살았다(金海 許氏. 府使 潔 后. 居坐雲里).

 

순흥 안 씨. 문성공 유의 후손. 서석면 어론리에 살았다(順興 安氏. 文成公 裕 后. 居瑞石面 魚論里).

 

전주 이 씨. 신라 사공 한의 후손. 검산리, 두촌면 내후동리에 살았다(全州 李氏. 新羅 司空 翰 后 居儉山里, 斗村面 內後洞里).

 

원주 이 씨. 평장사 춘계의 후손. 화촌면 군업리에 살았다(原州 李氏. 平章事 椿桂 后. 居化村面 君業里).

 

경주 이 씨. 판경사 구의 후손. 좌운리에 살았다(慶州 李氏. 判決事 龜 后. 居坐雲里).

 

청송 심 씨. 위위사승 홍부의 후손. 검산리에 살았다(靑松 沈氏. 衛尉寺丞 洪孚 后. 居儉山里)

 

무안 박 씨. 국자제주 진승의 후손. 화촌면 성산리, 두촌면 자은리에 살았다(務安 朴氏. 國子祭酒 進昇 后. 居化村面 城山里, 斗村面 自隱里).

 

영암 박 씨. 영암군 성제의 후손. 구만리에 살았다(靈岩 朴氏. 靈岩君 成濟 后. 居九巒里).

 

거제 반 씨. 기성군 우형의 후손. 구만리에 살았다(巨濟 潘氏. 岐城君 佑亨 后. 居九巒里).

 

청주 사 씨. 예부상서 요의 후손. 화촌면 장평리에 살았다(靑州 史氏. 禮部尙書 繇 后. 居化村面 長坪里).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거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때 우리는 흔히 ‘이게 아니면 성을 간다’라고 이야기한다. 자식이 큰 잘못을 했을 때 ’호적에서 파 버린다’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만큼 성은 불리는 성명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5년 홍천에 거주하는 성씨는 총 121개다. 그중 김 씨가 13,182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이 씨가 10,263명에 이른다. 가장 적은 성씨는 가(賈)와 복(卜) 씨로 각각 5명이다.

 

 

 

출처 백승 벌력 콘텐츠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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