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와 본관만으로도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홍천에는 어느 성씨가 살았을까?
이에 대해 홍천읍지는 성씨(姓氏)에 기록을 남겨 놓았다. 성씨(姓氏)는 성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성은 출생의 계통을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칭호다. 女+生으로 이루어진 성(姓)은 여성의 몸을 빌어 태어난 혈통을 말한다. 고대 모계사회에서는 여성만이 성을 가질 수 있었고, 성은 딸에게 대물림되었다. 이후 부계사회로 넘어오면서 남성의 성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천현의 토성은 셋이니 피, 변, 용 씨이다(土姓三 皮, 邊, 龍).’라고 기록했다. 토성(土姓)은 조선 전기 성씨의 한 분류로 고려 시대 이래로 과거(科擧) 또는 서리직을 거친 벼슬을 지낸 성씨를 일컫는다. 즉 양반의 성씨를 말한다. 또한 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토착 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홍천의 대표적인 토착 성씨가 바로 피, 변, 용 씨이다.
‘망성은 하나니 석 씨이다(亡姓一 石).’ 망성(亡姓)은 홍천현에 토착해서 살다가 없어진 성을 말한다.
‘차성은 신 씨이다(次姓 辛).’ 차성(次姓)은 홍천현에서 문벌이나 지위 등이 버금가는 성을 말한다. 조선 초기 홍천현에 거주하는 신 씨 가문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망래성은 원 씨이다(亡來姓 元).’ 망래성(亡來姓)은 한때 홍천현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나 지금은 없어진 성씨를 말한다.
‘속성은 둘이니 허, 최 씨이다. 최 씨는 천녕에서 이주해 왔는데 향리이다(續姓二 許, 崔 川寧來 鄕吏).’ 속성(續姓)은 이전 문서에서 빠진 성을 말한다. 이전 문서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저본인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말하는 듯하다. 천녕은 여주에 있던 현의 옛 이름이다. 향리는 한 고을에서 대물림으로 내려오는 아전을 말한다. 아전은 관에서 일을 보던 중인 계급이다.
‘사이암장 속성은 하나이니 석 씨이다(寺伊巖莊 續姓一 石)’. 사이암장은 홍천현에 속해있던 특수한 형태의 행정구역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이암장이 현의 동쪽 110리에 있다(寺伊巖莊 在縣東百十里)고 그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장(莊)은 지배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일종의 장원(莊園)이다. 장은 고려 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있었다. 주로 왕실의 어료지(御料地 : 왕실재정의 토대를 이루는 땅)였다. 장은 군현의 하부 단위 고을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현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홍천현에서는 없어졌지만 사아암장에는 여전히 석 씨가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씨 기록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本縣) 皮 邊 龍 石 辛. 元 來. 許 續. 崔 川寧. (寺伊巖) 石 續.’ 토성 대신 본현을 썼다. 본현 또한 토성과 마찬가지로 홍천을 본관으로 삼은 성씨를 말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토성 피, 변, 용에 석과 신 씨가 추가되었다. 원 씨 성은 래성 즉 외부에서 홍천현으로 이주해 정착한 성씨이다.
『여지도서』와 『홍천군읍지』에서는 간결하게 성씨만을 나열했다. ‘皮, 邊, 龍, 石, 辛, 元, 許, 崔’. 『화산현지』와 『홍천현 읍지(백원정사 필사본)』는 『여지도서』 내용에 원 씨가 래성이고, 허 씨가 속성이라는 내용만 추가했다.
『홍천현읍지』에서 남궁(南宮) 성씨가 처음 등장한다. ‘皮 邊 龍 石 辛 元 南宮 許 崔’ 『관동지』, 『관동읍지』, 『홍천현지』는 『홍천현읍지』와 순서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
일제강점기 발행된 『강원도지』에는 ‘세거씨족(世居氏族)’ 항목을 두어 좀 더 다양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본관과 시조 그리고 어느 마을에 주로 거주하는지에 대한 내용도 적었다.
홍천 용 씨. 고려 영상 득의의 후손. 동면 좌운리에 살았다(洪川 龍氏. 高麗 領相 得義 后. 居東面 坐雲里).
평강 채 씨. 신라 부마 원광의 후손. 서석면 동창리에 살았다(平康 蔡氏. 新羅 駙馬 元光 后. 居瑞石面 東倉里).
고령 신 씨. 문검교 성용의 후손. 서면 반곡리에 살았다(高靈 申氏. 文檢校 成用 后. 居西面 盤谷里).
함열 남궁 씨. 대장군 원청의 후손. 홍천면 희망리, 동면 월운리에 살았다. 각 리에도 나누어서 살았다(咸悅 南宮氏. 大將軍 元淸 后. 居洪川面 希望里. 東面 月雲里. 分居 各里).
해주 최 씨. 문충공 충의 후손. 북방면 구만리와 화촌면 성산리에 살았다(海州 崔氏. 文忠公 冲 后. 居北方面 九巒里. 化村面 城山里).
수성 최 씨. 수성 백영규의 후손. 북방면 화계리에 살았다(隋城 崔氏. 隋城 伯永奎 后. 居北方面 花溪里).
경주 김 씨. 제숙공 곤의 후손. 북방면 노일리에 살았다(慶州 金氏. 齊肅公 梱 后. 居北方面 魯日里).
김해 허 씨. 부사 결의 후손. 좌운리에 살았다(金海 許氏. 府使 潔 后. 居坐雲里).
순흥 안 씨. 문성공 유의 후손. 서석면 어론리에 살았다(順興 安氏. 文成公 裕 后. 居瑞石面 魚論里).
전주 이 씨. 신라 사공 한의 후손. 검산리, 두촌면 내후동리에 살았다(全州 李氏. 新羅 司空 翰 后 居儉山里, 斗村面 內後洞里).
원주 이 씨. 평장사 춘계의 후손. 화촌면 군업리에 살았다(原州 李氏. 平章事 椿桂 后. 居化村面 君業里).
경주 이 씨. 판경사 구의 후손. 좌운리에 살았다(慶州 李氏. 判決事 龜 后. 居坐雲里).
청송 심 씨. 위위사승 홍부의 후손. 검산리에 살았다(靑松 沈氏. 衛尉寺丞 洪孚 后. 居儉山里)
무안 박 씨. 국자제주 진승의 후손. 화촌면 성산리, 두촌면 자은리에 살았다(務安 朴氏. 國子祭酒 進昇 后. 居化村面 城山里, 斗村面 自隱里).
영암 박 씨. 영암군 성제의 후손. 구만리에 살았다(靈岩 朴氏. 靈岩君 成濟 后. 居九巒里).
거제 반 씨. 기성군 우형의 후손. 구만리에 살았다(巨濟 潘氏. 岐城君 佑亨 后. 居九巒里).
청주 사 씨. 예부상서 요의 후손. 화촌면 장평리에 살았다(靑州 史氏. 禮部尙書 繇 后. 居化村面 長坪里).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거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때 우리는 흔히 ‘이게 아니면 성을 간다’라고 이야기한다. 자식이 큰 잘못을 했을 때 ’호적에서 파 버린다’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만큼 성은 불리는 성명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5년 홍천에 거주하는 성씨는 총 121개다. 그중 김 씨가 13,182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이 씨가 10,263명에 이른다. 가장 적은 성씨는 가(賈)와 복(卜) 씨로 각각 5명이다.
출처 백승 벌력 콘텐츠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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