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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문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13] 효행(孝行)
홍천 곳곳에 남아있는 효자각, 효자문, 효자비...
용석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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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29 [17:05]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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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行

홍천 곳곳에 남아있는 효자각, 효자문, 효자비...

 

▲  동면 노천리 안사철 효자각, 동면 월운리 남궁종 남궁준 효자각, 남면 제곡리 이공소 효자각, 장평리 사기규 효자문

 

 

홍천읍지가 쓰여진 조선 시대에 충(忠)과 효(孝)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중 으뜸이었다. 임금에 충을 행하지 않으면 역적이고, 부모에게 효를 행하지 않으면 폐륜이었다. 임금이 사라진 21세기에 충에 대한 시각은 다양하지만 효만큼은 여전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로 여긴다. 『강원도지』에 홍천의 효자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 박성채는 영암 사람으로 무과 출신이다. 박경우의 후손으로 감찰사를 지냈으며 후에 좌승지에 올랐다. 3살 때 친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박성채는 부모를 섬김에 있어 지극 정성을 다했다. 어느 날 밤, 마을에 큰불이 났다. 거센 불길이 급기야 자기 집까지 옮겨붙게 되었다. 연기와 화염이 하늘까지 올라 접근조차 어려웠다. 집 밖에 있던 박성채는 통곡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맹렬하게 타오로는 불길로 뛰어들었다. 그때 하늘에서 별안간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기 시작했고 맹렬히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었다.

 

어머님이 병이 들자 살아있는 꿩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산꿩을 구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때 홀연이 산고양이가 꿩을 물고 와서는 박성채 앞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그 꿩을 어머님께 음식으로 만들어 올리자 병에 차도가 있었다. 또한 어머님이 담에 걸려 한 달이 넘도록 고생하자 의원이 두꺼비와 뱀으로 담근 술이 좋다고 했다. 이번에는 큰 구렁이가 두꺼비를 물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 구렁이와 두꺼비를 잡아 술을 담가 어머니께 드렸더니 효험이 있었다. 사람들인 이를 두고 신령이 도운 것이라 했다. 박성채의 효행을 특별히 기리고자 마을에 효자문을 세워다.’

 

박성채의 지극한 효행이 하늘과 산짐승을 움직였다. 때마침 분 역풍이 불길을 잡았고, 산고양이가 꿩을 잡아주고, 구렁이가 두꺼비를 물고 스스로 박성채 앞에 몸을 던졌다.

 

대를 이어 효행이 남달랐던 남궁종과 남궁준 부자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남궁종은 함열 사람으로 고려대장군 남궁원청의 후손이다. 타고난 기질과 성품이 영리하고 슬기로워 일찍이 글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으며 효행 또한 뛰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다리에 부종이 심했다. 앉고 누울 때 사람의 부축이 필요할 정도로 힘들어하자 남궁종은 매일 아버지의 아픈 곳을 입으로 빨아 효험을 보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스스로 물고기를 잡고 땔감을 구해 맛있는 음식을 아버지께 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여묘살이를 했다. 어린아이가 여묘살이를 하는 동안 산짐승들이 내려와 보호해 주는 이변이 있기도 했다.

 

이에 고을에서 상을 내리고 향교에 입학하기 전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맡겼다. 남궁종의 효행을 기리고자 마을에 효자문을 세웠다.’

 

‘남궁종의 아들 남궁준 또한 천성이 순박하고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남궁종의 효행과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어머니가 중풍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자 매일 밤 묵묵히 기도했다. 손가락을 베어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드리자 3일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다.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르고 아침 저녁으로 묘소를 돌보며 슬픔으로 3년 상을 마쳤다. 아버지가 신경통과 요통 등으로 몇 해를 고통 속에 지내자 의원이 산삼이 좋다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남궁준은 그 즉시 산으로 들어가 하늘에 빌고 빌었다. 이에 신인(神人. 신과 같이 숭고한 사람)이 나타나 산삼 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산삼을 먹은 아버지 남궁종은 곧바로 효과를 보았다. 이에 마을에서 표창을 하고 그 효행을 기리고자 마을 입구에 효자문을 세웠다.’

 

남궁종, 남궁준 부자의 효자각은 1900년에 세워졌고 홍천군 동면 월운리에 지금도 남아 있다. 남궁종의 현판에는 ‘孝子 贈 朝奉大夫 童蒙敎官 南宮鍾之門‘, 남궁준의 현판에는 ‘孝子 贈 從仕郞中 學校敎官 南宮準之門’이라고 쓰여있다. 준의 한자는 ‘石+準’이나 디지털 한자에서는 지원하지 않아 準으로 썼다.

 

부모님이 병이 들면 병세를 살피기 위해 변까지 먹어보며 병세를 살피는 효자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안사철과 사시규의 이야기다.

 

‘안사철은 순흥 사람으로 문성공 안유의 후손이다. 천성이 순하고 인정이 많았다. 글 공부를 잘했으며 부모님께 정성을 다했다. 어머니가 풍증으로 십여 년을 고생하자 밤낮으로 약시중을 들면서 어머니의 병세를 살펴보기 위해 변을 맛보았다. 어머니가 낫기를 하늘에 빌고 빌 때 어느 날 꿈에 신인이 나타나 ‘어느 산에 가면 영험한 약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알려준 곳에 가니 삼산 십여 뿌리가 있었고 이를 드신 어머님은 효과가 있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르고 여묘살이 하면서 3년 상을 마쳤다. 사림(士林)이 여러 차례 상을 내렸다. 사헌부 감찰관직을 받았다. 효행을 기리고자 마을에 효자문을 세웠다.’

 

안사철 효자각은 홍천군 동면 노천리에 있다. 본래의 안사철 효자각은 1885년에 지어졌지만 6. 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효자각은 순흥 안 씨 재각과 함께 1984년 후손들에 의해 다시 세워진 것이다. 안사철 현판에는 ‘孝 紀位 安思喆 贈 通訓大夫 司憲府 監察者 配位 淑夫人 原州 李氏 光緖 十一年 十一月 十日’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기규는 청주 사람으로 고려 예부상서 사요의 후손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검소하지만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극진해 봉양했다. 어머님이 병이 들자 변을 맛보면서 병세를 살폈고, 어머님이 위독해지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해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했다.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상을 마쳤다. 사림(士林)이 여러차례 상을 내렸다. 향교에 입학하기 전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맡겼다. 효행을 기리고자 마을에 효자문을 세웠다.

 

사기규 효자문은 1892년 홍천군 화촌면 장평리에 세워져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강원도지』에는 이외에도 효행과 관련해 효자 허준, 고응도 이야기와 효부 횡성 고 씨 이야기 도 실려 있다.

 

홍천읍지에는 기록이 없지만 홍천 마을 곳곳에는 적지 않은 효자문, 효자각, 효자비가 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에게 달려드는 호랑이를 쫓아버린 내촌면 화상대리의 방세군 비석, 내촌면 물걸리 변문희 효자각, 두촌면 철정리 이창주 효자문, 남면 제곡리 이공소 효자각, 남면 유치리 이회명, 이회봉 효자 비석. 화촌면 성산리 박영철 효자비, 화촌면 군업리 김규한 효자비, 서석면 청량리 정규시 효자각 등이 있다. 비록 정려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두촌면 철정리 철은정에 얽힌 양응원 효자 이야기, 북방면 구만리 박성래 효자문과 박용하의 처 횡성 고 씨에 관한 이야기도 마을에 전해 내려온다.

 

효녀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건 아마도 조선 시대의 시대상이 반영된 듯싶다. 조혼이 성행했기에 여성은 철이 들 즈음이면 출가외인이 된다. 거기에 유교의 생활 규범으로 며느리는 늘 뒤에 서야 했다. 시집에 와서 벙어리로 3년, 장님으로 3년, 귀머거리로 3년을 지내야 비로소 그 집 식구로 받아들여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의 며느리(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효녀, 효부라 해도 과하지 않을 듯싶다.

 

 

 

출처  백승호 벌력 콘텐츠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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