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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칼럼] ♥ 나무위에 달린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
벌거벗은 임금님을 말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순절 단상
용석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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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28 [20:30]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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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위에 달린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 

벌거벗은 임금님을 말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순절 단상

 

 

 

인생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젊었을 때만큼, 가슴 뛰는 즐거움이 없다고들 하신다.

()와 락()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된 삶의 조건은 여전한데

예전에는 젊었었기에, 가슴 뛰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촉이 작동했다면,

젊음자체가 고유한 능력이고 고유한 행복이었음이 분명하다.

 

청년 예수가 부활하기 전 단계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사건을 묵상하는 40일간의 절기를

사순절(四旬節)이라 부르는데 지금이 그때다.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라도 타락한 인류를 그토록 사랑할 만큼,

가슴 뛰는 에너지가 그에게 작동하고 있었다면

그는 분명 고유한 초월적 능력의 소유자다.

그렇게 때문에 이번 절기만큼은 예년과 달리,

나는 그 분을 행복한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할 능력이 있어도 사랑할 대상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할 대상이 있어도 사랑할 능력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경건의 모습은 조금 있을지 몰라도

진정 그것의 능력이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결핍감 때문이다.

 

온전치 못한 인간일수록 사랑하는데 장애물이 더 많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다 해도, 또 사랑하고픈 마음이 있다고 해도,

대상에 대한 편견과 사실에 대한 인지오류가 사랑의 길목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짝사랑이 그러하다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먼 이야기이겠는가?

넘어야할 장애물이 배나 되니 말이다.

 

사랑이라는 말과 개념은 층층시하 세상에 더욱 차고 넘치는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고갈되어 가는 듯해서 씁쓸하다.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사랑의 향기가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유치함 일까? 정직함 일까?

 

언제까지 뜸들이지 말고, 간만 보지 말고

하늘의 초월적 능력이 우리들 눈높이에 맞춰 시원하게 한 번 나타나셔서

우리 능력으로는 도저히 벗을 수 없는 편견의 색안경을

모두 벗겨 주셨으면 좋겠다.

기적(miracle)을 보고 표적(sign)을 알아차리는 눈이 뜨도록 말이다.

그래서 청년 예수처럼,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충만했으면 좋겠다.

 

기적을 보여줘도 안 믿는 사람은 믿지 못한다고 흔히 듣는 설명은

구약에 나오는 특별한 경우를 너무 일반화시킨 상투적인 변명처럼 들린다.

사이비 논리에도 너무 쉽게 세뇌되는게 인간인데,

정말 위대한 기적을 몇 번만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아니라고 버틸 인간이 과연 있을까?

 

누가 더 그럴듯하게 속이는가?”하는 것이

능력이 되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진짜와 가짜의 쌩얼(화장하지 않은 멘 얼굴)이 그냥 그대로 드러나서

새 판을 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소경이 소경을 서로 인도하겠다

부질없는 갈등과 고뇌를 반복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본래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잔인한 4이라는 말이 영원히 사라지도록 말이다.

 

 

 

윤영호 칼럼니스트(시인, 수필가,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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