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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문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12] 열녀(烈女)
열녀, 손가락 베어 간호하고, 남편 따라 자결하고...
용석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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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22 [15:30]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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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손가락 베어 간호하고, 남편 따라 자결하고...

 

▲     홍천군 화촌면 외삼포리  조선시대 충신 이사규를 따라 자결한 아내 완산 이씨의 열녀문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이 빼곡한 홍천읍지에서 ‘사람 이야기’는 색다름이다. 삼종지도(三從之道), 일부종사(一夫從事), 칠거지악(七去之惡) 등 유교가 통치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였던 만큼 ‘사람 이야기’도 말랑말랑하기보다는 교훈이 앞선다.

 

시대 상황을 빼고 읽어보면 애틋하고 애틋하고 또 애틋하다.

 

『홍천현읍지』와 『강원도지』에 각각 열녀(烈女)와 열부(烈婦) 항목이 나온다. 열녀(烈女)와 열부(烈婦)의 사전적 의미는 고난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켜 남의 모범이 될만한 여자이다.

 

열남(烈男)은 사전에 없다. 열부(烈夫)는 절개가 굳은 선비다. 첩(妾)이 허용되었던 조선시대였지만 아내에 대한 신의와 예의를 지킨 열부(烈夫)에 대한 이야기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홍천읍지에는 기록이 없다.

 

홍천읍지에 기록된 열녀는 3명이다. 『홍천현읍지』에 박 씨와 이 씨 그리고 『강원도지』에 유 씨의 열녀문이 세워진 내용을 기록했다. 시대를 반영하듯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박 씨는 선비 남궁집의 처다. 남편이 역병으로 죽자 밤낮으로 통곡했다, 물과 간장조차 입에 대지 않았다. 자살하려고 독약을 모았지만 임신 막달이어서 대를 잇고자 출산했다. 딸을 낳았지만 어린 나이에 죽자 박 씨는 그날로 약을 마시고 죽었다. 후에 널리 전하고자 열녀문을 세웠다. 

 

朴氏 士人南宮鍓妻也. 夫以痘疾死 晝夜痛哭. 水醬不入口潜儲毒藥卽欲自裁 而適當産月 冀續後嗣 生女卒夭 其日飮藥死. 後旌閭.’

 

어느 마을에 있었던 일인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자재(自裁)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정려(旌閭)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칭송하고자 그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붉은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을 말한다. 『홍천현읍지』 기록된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강원도지』에도 실었다.

 

좀 더 적극적인 아내의 이야기도 기록했다. 집안에 든 도적으로부터 남편을 구한 이 씨의 이야기도 『홍천현읍지』에 실려있다.

 

‘이 씨는 선비 신숙고의 처다. 집에 도적이 난입해 숙고(남편)가 위험해 처하자, 이 씨가 어미 새가 새끼를 품듯 감싸 안아 대신 칼을 받았다. 도적에게 ‘차라리 나를 죽이고 나의 남편을 살려주어라’라고 말했다. 부인 이 씨의 의로움에 도적은 칼을 거두었고. 이러함에 힘입어 목숨을 구했다. 후에 모범으로 널리 전하기 위해 열녀문을 세웠다.

 

李氏 士人辛叔高妻也 明火賊突入其家 難所叔高 李氏 掩席覆之以身翼蔽 代受鋒刃 哀乞於賊 曰寕殺我無殺我夫賊 義而釋之高賴而得生 後旋表其門’

 

역시 어느 마을에 있었던 일인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명화적(明火賊)은 명화도적(明火盜賊)으로 남의 재물을 마구 빼앗으며 행패를 부리고 돌아다니는 무리다. 익폐翼蔽)는 어미 새가 날개로 새끼 새를 품는 동작을 말한다.

 

『강원도지』에 또 한 명의 열녀가 등장한다. 남편이 병이 들자 칼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먹였으나 끝내 남편이 죽자 장례를 치르고 자결한 유 씨 이야기다.

 

‘유 씨는 전주 유 씨다. 희의 딸이며 김해 허은수의 아내다. 시부모를 모심에 있어 정성을 다했다. 공경하던 남편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남편에게 먹였다.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했음에도 결국 남편 상을 당하자 모든 장례절차를 예법에 맞게 치렀다. 조용히 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했다(자결했다). 사림이 포상했다. 세상에 알려져 이를 기리기 위해 열녀문을 세웠다.

 

柳氏 籍全州 熙女 金海許殷洙妻 孝事舅姑克盡誠 敬夫病斫指注血 禱天願代及喪盡初終之禮 從容就義 士林有褒狀 事聞命旌閭’

 

홍천읍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화촌면 외삼포리(화촌면 산초울로 117-20)에 완산 이 씨 열녀문이 있다. 이 씨는 조선 인조 때 충신인 이사규의 아내다. 이사규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갈 때 이 둘을 보호하기 위해 자진해서 따라나선 인물이다. 청나라에서 용골대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무례하게 대하자 이를 강력히 항의하다 끝내 처형된 인물이다. 이후 이사규는 말 위에 머리만 실려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에 이사규의 처인 이 씨는 시신도 없이 머리만 돌아온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삼년상을 마친 뒤 첫 제사를 지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인조 때의 일을 200년이 지나 순조가 듣고 이사규와 그의 아내 이 씨에게 정3품인 통정부사와 이조참의를 벼슬을 내리고 아내인 이 씨는 숙부인에 명했다. 『순조실록』에 기록이 남아있다. 이 씨 열녀문 현판에 이런 내용을 간략히 기록했다.

 

‘忠臣 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行 通訓大夫 兵曹正郞 李士珪妻烈女 贈 淑夫人 完山李氏之門 上之二十三年三月 日

 

충신에게 통정부사 이조참의의 관계(품계)를 내리고. 관직은 통훈대부 병조정랑이다. 열녀인 이사규의 처는 숙부인에 봉한다. 완산 이 씨 열녀문이다. 순조 23년 3월 일’

 

안타깝지만 『홍천현읍지』에 기록된 박 씨와 이 씨 그리고 『강원도지』에 적혀 있는 유 씨의 열녀문은 남아 있지 않다.

 

 

출처  백승호 벌력 콘텐츠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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