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문화
홍천향교 입간판 교체,.. 발 빠른 대처로 역사오류 바로 잡아
동언우 연구위원, 승정원일기에서 ‘홍천향교 이건’ 확인, 역사오류 지적
용석춘 기자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사입력: 2020/11/04 [16:50]  최종편집: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홍천군이 지난 10월 홍천향교의 역사를 알리는 입간판 내용에서 역사기술 오류를 확인하고 즉시 입간판을 교체했다.

 

 

▲   새로 교체된 홍천향교  입간판     © 용석춘 기자

 


지난
712, 동언우 홍천문화원 연구위원이 홍천향교(洪川鄕校))의 창건(創建)과 이건(移建)의 역사를 안내하는 입간판 내용이 역사적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본지 712일 자>을 제기하면서 이를 확인한 홍천군 문화체육과 주무부서가 관계기관 등의 절차를 거쳐 홍천향교의 오기된 역사기록을 다시 수정했다.

 

이전 홍천향교 앞에 세워진 입간판 내용은 홍천향교가 홍천군 두촌면 철정리에 지어졌다가 화촌면 내삼포리로 옮긴 이래로, 홍천읍 2리를 거쳐 지금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홍천향교지에 기록된 홍천향교의 연혁에서는 “1531(중종26) 홍천군 두촌면 철정리 속칭 향교골에서 창건했다. 그리고 1560(명종15) 두촌면 철정리에서 화촌면 내삼포리로 이건하였다. 1596(선조28) 내삼포리에서 홍천읍 희망2리로 이건하였다. 이어 1635(인조30) 홍천읍 희망2리에서 현재의 위치인 희망1174번지로 변천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동 위원은 조선전기 중종의 명에 따라 성종 때 편찬된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를 보면, 홍천현 [학교]조에 현의 서쪽 2리에 향교가 있다.(在縣西二里)”로 기록되어 있어 홍천향교의 개창(開創)시기는 1531년이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기반이 되는 팔도지리지가 완성된 1478년 이전인 조선초기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형원이 편찬한 전국지리지(全國地理誌)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1656)에도 현 서쪽 2리에 향교가 있다.”로 기록되어 향교가 철정리에서 내삼포리로 이건(移建)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특히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향교가 관아(官衙)가 소재한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동 위원은 위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홍천향교가 이건(移建)을 했다면, 조선정부에 품의(稟議)한 기록이 문헌에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여러 문헌을 확인하던 중,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승정원일기숙종 20(1694) 53(乙未)편에서 홍천향교 이건에 관한 기록을 확인했다.

 

그것은 1694(숙종20) 홍천의 유생(儒生)인 이사원(李士元)이 수재(水災)로 인해 무너진 홍천향교의 복구를 위해 택지(擇地)하여 이건(移建)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유생 이사원은 7년 전, 정묘년(1687) 장마(水災)로 인해 무너진 홍천향교에 대하여 구구절절 살피며 중창(重創)하는 것이나 이건(移建)하는 비용이 크게 경중이 없으니 합당한 땅을 찾아 성묘(聖廟)를 이건(移建)하게 해 줄 것을 임금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숙종은 비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진달(陳達)한 일을 해당 관청이 품처(稟處)하라.’고 윤허한다.”

 

 

 

▲   홍천향교

 


동 위원은 이 기록을 근거로
1694년 다음해인 1695(을해년)에 홍천향교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시기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하고 이 같은 사실을 군 주무부서에 알린 것이다.

 

동언우 연구위원은 홍천군 문화체육과 주무부서에서 홍천향교 입간판에 기록된 역사가 잘못 기술됐다는 저의 주장을 간과하지 않고 즉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또 입간판 내용을 수정해 새로 교체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 홍천뉴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