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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칼럼] ”옳음”과 “분노”

용석운춘기자 | 기사입력 2020/11/03 [14:20]

[윤영호 칼럼] ”옳음”과 “분노”

용석운춘기자 | 입력 : 2020/11/03 [14:20]

 ♥”옳음”과 “분노”

 

 

 

 

“분노는 독(毒)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인간관계 또는 정신적으로 해롭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몸에 독이 되기도 한다. 화를 내는 순간 근육이 긴장되며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신체에 전달된다. 그러길래 화가 나면 몸과 마음이 경직되어 “비상사태모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아드레날인계 호르몬찌꺼기가 심장에 쌓이고 쌓이게 되면 심장병, 화병의 원인이 되어 심각한 장애를 불러올 수 있다. “분노물질”이라고 까지 불리는 이 호르몬의 독성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하면, 사람을 즉사 시키는 독사 “코브라” 다음으로 강한 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분노현상이나 신경계 호르몬은 조물주가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시스템인 것은 맞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급박한 비상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성적 판단 이전에 순간적인 조건반사작용을 통해 나를 해치려는 상대에게 적시에 효과적인 대응조치를 하기위해 마련된 응급시스템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일시적으로 분노가 약(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시시대 밀림에 사는 것도 아닌데, 독이 약효과가 있다고 해서 독을 계속 마셔댈수도 없다. 시도때도 없이 비상시스템이 작동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마치 평시보다 전시가 더 빈번하다면 계속 긴장해야 하는 국민의 삶이 피로감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 분노는 왜 일어나는가?

 

“억울하다는 감정”과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는 기준의 강도”에 비례해서 화는 더 일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감정과 기준이 온전하게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내 감정과 느낌이 균형을 잃었거나 불완전하다는 자각이 없는 한, 내 기준이 불변의 진리가 되고 내 감정이 하늘의 율법이 되며 나 자신이 엄중한 심판자가 되는 것이다. 불같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화” 자체가 마치 나의 분신처럼 착각되기 때문이다.

 

나와 똑같을 수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인데, ”내가 옳다” 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되면, 태생적으로 나와 같을 수 없는 주변사람들은 “옳지 않은 사람”, 다시 말해 “틀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틀린 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못 견뎌 하는 그 감정이 지속적으로 표출될 때 화평과 조화는 깨질 수 밖에 없다. 보통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자기가 별로 “틀리지 않다”라는 잠재적인 생각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자신의 옳지않은 점을 신(神)의 잣대로 일일이 예민하게 재단하면서 살아간다면 죄책감,우울감,무력감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분노가 얼마나 해로우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독(毒), 즉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3독(毒) 중의 하나로 설정 되었겠는가? 어느 것이 “옳다 라는 집착”을 법집(法執)이라고 까지 말하는 것은 그만큼 옹고집이라는 뜻으로서, 이는 인지오류를 불러오는 확고한 장애요인이 되는 것이다. 

 

아토피처럼 지나친 청정에만 익숙하면 몸의 면역체계가 무너지듯, 지나친 “옳음(法執)”에만 집착하면 마음의 면역체계가 무너진다. 그 무너짐의 반응이 나 자신뿐만아니라 내 주변에 전이되기 때문에 “지나친 옳음”은 “불화(不和)의 씨앗”이 되고 화평을 깨는 주범이 된다. 더불어 함께 살아야만 하는 이 세상에 화평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복이 있다(마5:9)고 까지 말했겠는가? 

 

하늘의 율법도 사람을 위한 것(눅6:1-5)이라고 그리스도는 가르쳤다.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율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너무 가파른 산에는 나무가 자라기 어렵고, 너무 험란한 급류에는 물고기가 머물기 어렵다.

 

요즘 세태는 숨막힐 정도로 “모 아니면 도”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원래 선악과(善惡果)이야기는 이분법논리다. 선 아닌 것은 모두 악이라는 논리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에서는 뚜렷한 선(善)과 분명한 악(惡)보다 오히려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닌 영역”이 더 클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만약 이세상에 선악(善惡) 두진영만 있다면, 자기 자신이 악의 진영에 속했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와 내편이 아닌 것은 모두가 제거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분법논리(흑백논리)에 근거한 내 “옳음의 잣대”로 끝까지 분을 내어 죽이는 길을 고집할 것인가? 삼분법논리로써 내 “옳음의 칼날”을 자제하여 함께 사는 길을 찾겠는가? 

 

서로가 똑같이 거짓말하면서 “누가 옳은가”를 밝히고자 한다면,

 

누가 더 거짓말을 참말처럼 잘 하는가? “답 없는 말싸움”과 “원수 갚는 악순환 역사”만 되풀이 될 뿐이다.

 

윤영호 칼럼니스트(시인, 수필가,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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