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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감리교회,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곽일석 목사

홍천뉴스투데이 | 기사입력 2020/09/16 [23:45]

한국감리교회,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곽일석 목사

홍천뉴스투데이 | 입력 : 2020/09/16 [23:45]

 

▲   곽일석 목사

 

 

지난 9월 12일 연합뉴스를 비롯하여 국내의 다양한 언론 매체들이 소식을 전하면서,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원성웅 감독이 방역당국의 비대면 예배 조치를 비난하며 오는 9월 20일부터 서울연회 소속 교회들이 현장 예배를 드리도록 촉구하고 나섰다는 보도를 쏟아내었습니다.

 

서울연회 원성웅 감독의 목회서신으로 인해 교단내 목회자들도 설왕설래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코로나19로 인해 고단한 목회를 이어가는 현장 목회자들에게 오히려 목회적 부담만을 가중시키는 신중치 못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급기야 서울연회 강북지방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한국교회를 분열과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원성웅 감독의 목회서신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와 철회를 요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발표된 KNCC의 성명서에 따르면, “교회는 교회 자신의 안전과 안락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존재 목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과 자연의 생명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와 목회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 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이웃과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동안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우리들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교회 중심성을 드러내어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무지와 자만, 욕망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신뢰가 붕괴된 거의 반사회적 집단이 되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교회와 사회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던 천안 안서감리교회 고태진 목사의 관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라면서 비대면 예배를 알리는 안내문을 붙인 고태진 목사는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경우 교회들이 방역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대면예배를 드리다가 연속적으로 확진자가 발생하였던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증대시켰던 터라, 우선은 이 사태의 책임이 바로 우리 자신에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 한국교회와 감리교회는 한국사회를 향해 마땅히 큰 사죄를 해야 하고 보다 책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서울 북노회 50개 교회는 지난달 말부터 ‘교회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라는 현수막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육순종 성북교회 목사(기장 총회장)는 “이러다 한국 교회가 망하는 것은 아닌지 위기감을 느꼈다”며 사회에 사과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현수막을 걸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 문구는 ‘미안합니다’ 였지만 교회가 더 낮아져야 한다는 생각에 ‘죄송합니다’로 수정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앞으로의 목표 역시 단순히 코로나19 이전의 ‘모이는 교회’로의 회복일 수만은 없습니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노력 속에, 인류공동체의 생명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이웃과 지역과 마을로 ‘흩어지는 교회’의 현장인 삶의 자리에서, 보다 선명하게 새로운 중심을 잡아가야 하겠습니다.

 

‘모이는 교회’를 위해 투자되던 많은 자원이, ‘흩어지는 교회’의 삶의 현장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이웃과 자연, 생명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재구성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이는 교회’의 진정성은 ‘흩어지는 교회’ 즉 지역과 마을 속에서 이웃과 타자를 향해 빛과 소금으로 나서는 삶과 사역을 통해서만 그 진정성이 증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보면, 서울연회 원성웅 감독의 목회서신과 관련하여 일부분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다 하여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연회이기에 감리교회 초기 선각자들이 정초를 놓았던 선교 사역의 정신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고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져봅니다.

 

한편 우리가 속한 자랑스러운 한국감리회의 초기 선교 사역에 있어서 정초를 놓았던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봉사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이런 모든 두려움의 환경과 전염병의 위험 속에서도 생명을 구하려는 희생적인 봉사를 통하여 한국기독교 선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윌리엄 스크랜턴의 한국 선교는 세계 선교 역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특별합니다. 그는 아내와 어린 딸, 그리고 어머니 3대가 함께 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 주저 없이 길을 떠난 아브라함(창 12:1)과 같은 출발이었습니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은 당시 53세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 선교사를 따라 그냥 길을 나선 것이 아니라 미 감리회해외여선교회(WFMS)로부터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온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습니다.

 

1885년 5월 3일 서울에 들어온 윌리엄 스크랜턴은 6월 15일 미국 공사관 건너편에 한옥 기와집을 구하여 이사한 후 9월 10일부터 진료했습니다. 환자들이 늘어나자 1886년 6월 한옥을 추가로 구입한 뒤 환자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 어디에도 내가 의사라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 없습니다.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 말을 듣고 찾아오는데 서양 의술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시설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나는 병원 출입문에 간판을 만들어 붙이기로 했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자니 내 어학 선생이 자기에게 맡기라면서 나와 상의도 없이 이렇게 적어 왔습니다. 한문과 한글로 ‘미국인 의사 시약소’(American Doctor’s Dispensary)라 적은 것을 한쪽 기둥에 걸고 다른 기둥에는 경고문처럼 ‘남녀노소 누구든지 어떤 병에 결렸든지 아무 날이나 열 시에 빈 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라고 써 붙였습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의 연례보고서”, 1886).

 

정동에서 시작한 병원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환자 수가 처음 1년 동안에는 1,937명, 그 이듬해에는 4,930명에 이르렀습니다. 같은 의료 선교사였던 알렌(Horace Allen, 한국명 안련)이 고종황제의 특혜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중원을 세운 것과 달리, 선교사의 순수 투자로 설립된 스크랜턴의 병원에는 돈 없고 가난한 계층들이 몰려들었습니다.

 

1886년 “윌리엄 스크랜턴의 연례보고서”(275-276p)를 보면, 이 병원에서 처음으로 치료한 환자는 풍토병에 걸려 서대문 성벽 아래 버려졌던 여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도성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나는 그렇게 버려진 한 엄마와 딸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은 단지 가마니 한 장은 깔고 또 다른 가마니 한 장을 덮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구걸에 의지했습니다. 남편은 그들을 거기에 버려두고 시골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 그날 밤 아주 큰 추위에 빠졌을 때 나는 막노동꾼을 불러 그 여자에게 다시 가게 되었고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 세 주간이 흐른 후 그 여자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기뻐할 만큼이나 밝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이 있는 일입니다. 그 여자가 앓고 있던 이 질병은 이 계절에 한국에서는 대단히 자주 일어나는 회귀열이란 병으로 아주 무서운 질병 중의 하나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날 밤 들것에 실어 여인을 병원으로 옮긴 짐꾼들의 입을 통해 스크랜턴의 ‘착한 일’은 소문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죽어 가는 환자를 치료해서 3주 만에 살려냈다는 소문이 나면서 스크랜턴의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조선 시대 기관이나 건물이 국가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인증을 받는 방법은 국왕이 이름을 지어 보내는 작명하사였습니다. 스크랜턴의 병원에 내려진 이름은 ‘시병원’(施病院)이었습니다. ‘베풀 시(施)’ 자를 붙인 것으로 고종황제와 백성의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훗날(1901년) 한국 교인들은 스크랜턴의 시병원 사역의 내용과 의미를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시란돈 장로[스크랜턴]끠…셔 나오시던 해에 대정동에다 병원을 설시하여 대한에 잇는 병든 불상한 사람 보시기를 시작하셧난대 우리나라 대황제 폐하끠…셔 이를 아시고 깃버하사 시 장로사의 대한백성 사랑하심을 치하하신 후에 그 병원 일홈을 시병원이라 하라 하시고 시병원이라 쓴 현판을 사급하시샤 시병원 문압헤 걸게 하시니 시 장로사끠…셔 이래 이 일에 대단히 주의하야 밤낫으로 괴로옴을 생각지 아니하시고 여러 병을 곳치셧시며 죽을 처지에 잇난 사람을 만히 구워하셧나니라. 그 병원에 단이어 병 곳친 사람의 수효는 도합 오만 명가량이 되어슬듯 하더라”(“시란돈 장로사와 그 대부인 귀국하심”, <신학월보>, 1901. 8).

 

그런데 이때 윌리엄 스크랜턴은 안전하고 편리한 정동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정동은 거주하거나 활동하기에는 편리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오기에는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경운궁, 경희궁 등 궁궐이 근처에 있고, 양반 집과 외국 공사관들에 둘러싸인 정동은 귀족들이나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곳이지 가난한 사람이나 격리 치료가 필요한 전염병 환자들은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문 밖에 버려져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집 안에서 운명하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불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인 같은 사람들이 회생 불가능한 병이 들거나 전염병에 걸리면 성 밖으로 추방되어 짚으로 만든 움막 안에서 혼자 살도록 버려지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집조차 제공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버림을 받기 때문에 사망률이 더욱 높아진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국에는 이런 환자들을 돌볼 만한 자선기관이 거의 없는 형편이라 환자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서울 성문 밖 어느 곳을 가 보던지 언제나 이처럼 버려진 환자들을 수백 명씩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이처럼 전염병이 창궐한 특별한 지역에 집 한 채를 마련해서 이런 환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로 꾸며 치료와 함께 필요한 땔감과 음식을 제공하고자 합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이 레이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7).

 

윌리엄 스크랜턴은 성문 밖으로 눈을 돌려 그곳으로 병원을 옮길 계획을 세웠고, 그 병원을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라 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참된 의료선교 사역의 극치에 놓인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병으로 괴로워하는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며 그러한 친절한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에게 명령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생명들을 구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나는 그러한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을 시작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이 레이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7. 8. 13).

 

결국 본부의 승인 아래 스크랜턴은 1888년 12월에 애오개 시약소, 1890년 10월에 남대문 시약소, 1892년 동대문 시약소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정동에 있던 시병원은 ‘여리고 골짜기’ 같은 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리고 병원이 떠난 자리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예배당인 지금의 문화재예배당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상기 내용에서 인용된 월리암 스크랜튼과 관련한 자료는 백석대 성백걸 교수(한국역사신학연구소)의 허락을 받아 인용하였습니다.

 

2030 메소디스트 포럼(Methodist Forum)  총무 곽일석 목사(iskwa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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