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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권리와 씨앗의 본질적 관계에 대한 고찰
유병덕 이시도르지속가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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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3/20 [12:3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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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을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으로 구별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유동자본이란 계속적인 교환을 통해서만 이윤을 가져다주는 자본이고, 고정자본이란 소유주를 바꾸지 않고 수입이나 이윤을 가져다주는 물건이다. 유동자본의 예는 상인의 화물이나 화폐가 대표적이고, 고정자본의 예는 토지, 기계, 생산도구이다. 유동자본은 지출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하고, 고정자본은 보유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한다.

 

 

 


농업자본도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으로 나뉘는데, 고기를 팔기위해 사육하는 소는 유동자본이고, 일소(역축, 役畜)는 고정자본이다. 젖소가 생산한 우유는 유동자본이고, 젖소 자체는 고정자본이다. 스미스는 농부가 심는 씨앗도 고정자본이라 했는데, 국부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씨앗의 가치 전체도 역시 적절하게도 고정자본이다. 씨앗은 토지와 창고 사이를 왕복하지만 결코 소유주를 바꾸지 않으며, 따라서 유통한다고 말할 수 없다. 농업자는 씨앗의 판매에 의해서가 아니라 증식에 의해 이윤을 획득한다.”

스미스가 씨앗을 고정자본이라 한 이유는 농부가 씨앗 자체를 유통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보유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하게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러하다. 농부는 씨앗이 아닌, 씨앗으로 생산한 농작물을 내다 팔아 이윤을 획득하게 되므로, 씨앗은 유동자본의 원천이 되고 농부가 반드시 보유해야 할 고정자본이 된다.

그런데 씨앗은 크기가 작고 손쉽게 운반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게다가 하나의 씨앗이 수백수천 개씩 많은 양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대개는 일 년이 지나면 쓰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고정자본이라 하면, ‘고정’이라는 말이 나타내듯, 쉽게 운반할 수 없고, 양이 변하기도 어렵고, 일 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이용 가능한 상태로 보유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기계, 토지, 일소나 젖소를 보면 고정자본의 특징이 느껴진다. 그런데 왜 금세 없어질 수도 있는 씨앗이 고정자본이 될까?

그것은 씨앗의 가치가 물리적으로 관찰되는 물체로서의 씨앗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부가 농사를 지으면서 씨앗을 관리한다는 것은 씨앗에 깃들어 있는 유전정보를 관리한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씨앗의 가치는 씨앗 속에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농부가 봄에 볍씨를 심어 가을에 낟알을 거둬들이는 양이 많을수록, 밥맛이 좋을수록, 병해충에 대한 저항력이 강할수록, 그러한 볍씨에 더 높은 가치를 주게 된다. 씨앗의 가치는 그 품종이 갖는 유전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 있다. 과거에는 농부들이 내년에 더 좋은 씨앗을 심기 위해 튼실한 개체를 눈여겨보며 보호하기도 했고, 아는 농부와 씨앗을 교환하며 다양한 품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농부들이 씨앗을 관리하고 실험했던 일은 씨앗의 유전정보를 관리하던 일이었다. 고정자본으로서 씨앗의 가치는 유전정보에 있다. 유전정보는 보이는 물체가 아니라 농부의 머릿속에 씨앗의 특징으로 기억되는 것인데, 이는 결국 지적재산이라 할 수 있다. 스미스가 씨앗을 고정자본이라 한 것은 농부가 씨앗을 보유하는 일이 지적재산권을 갖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씨앗은 농부들에게 주어질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다. 농부들이 씨앗의 권리를 가질 때 농업생태계도 나라의 식량주권도 지킬 수 있다. 사진은 무 씨앗을 심고 있는 한 여성농민의 모습. 한승호 기자



씨앗은 농부의 지적재산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스미스가 씨앗이 고정자본이라 주장한 것을 비판했다. 불변자본(고정자본)도 역시 자본 증식을 위한 재생산 도구일 뿐 ‘고정’과 ‘유동’을 구별하여 설명한 스미스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 했다. 자본의 축적을 통한 재생산이 노동자를 억압하고 소외시키고 있다 보니, 마르크스의 시각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자본도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를 사랑한 그는 농업노동자의 고통을 설명하고자 했겠지만, 농부들이 창조적이고 목적의식적으로 땅을 일구는 ‘농민농업’의 면면한 생명력을 바라보지 못한 듯하다.

농업은 토지, 자본, 노동력만으로 생산될 수 없다. 그밖에도 씨앗이 있어야만 생산이 가능하다. 농업 생산에 필요한 씨앗을 자본의 일반적 속성에 비춰 해석하는 것이 더 큰 오류이다. 당시의 농부들이 (혹은 지주들이) 씨앗을 종자회사에서 구입하여 심었겠는가, 작년에 받아놓은 건강하고 번식이 가능한 씨앗을 심었겠는가? 농업은 자연에 의지하고 그 섭리를 따르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기에 자본의 재생산 메커니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실 스미스가 씨앗을 요즘의 지적재산권 개념을 인식하여 고정자본으로 분류했을 리는 없다. 국부론에도 ‘유전정보’ 혹은 ‘지적재산권’과 같은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자본의 운동을 관찰하고 그 원리가 농업에서도 적용된다고 검증했을 것이다. 그의 눈에 씨앗은 토지와 같이 농업 생산에 꼭 필요한 요소이면서도 농부 아닌 자가 가지기 어려운 농부들의 전유물로 보였을 것이다.

마치 대대로 전수돼 온 풍물 장단과 같이 필요한 이가 가져 그것을 삶의 동력으로 삼고 살게 만드는 정체성의 표상이 아니었을까? 요즘 사회 여러 분야에서 지식인들이 독차지해 (마르크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자본 축적의 도구로 이용하는 지식재산이 농사에 쓰이는 씨앗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오늘날은 씨앗의 그런 속성을 정말로 자본 축적에 이용하는 세상이 됐다. GMO와 기업종자들이 그러하다.



자본 축적의 도구로 쓰이는 씨앗

오늘날의 씨앗은 어떠한가? 농부들은 스스로 씨앗을 지속가능하게 관리하며 이윤을 획득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씨앗을 기업이나 공공기관에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농부들은 스스로 품종의 개발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유전정보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업이 제공하는 유전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농부들은 고정자본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전정보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자기 씨앗의 유전정보를 바탕으로 논밭에 거름을 넣고 흙과 물을 주체적으로 관리하던 농부로서의 자립성과 전문성을 잃어 버렸다.

농부들이 씨앗이라는 지적재산권을 잃어버리면서, 그들은 자영농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게 됐다. 농부들이 씨앗의 권리를 잃어버리는 동안 종자기업들은 농업 엔지니어들과 함께 상업적 네트워크를 치밀하게 구성했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중요한 경제 주체였던 농부들은 이제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농업 엔지니어들의 네트워크에 종속됐다.

오늘날 농부들은 씨앗뿐만 아니라 농약, 비료, 기계 등 농업 기술의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자본가 집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힘들어졌다. ‘농민농업’이 소멸해 가고 있고, 농부들은 전근대 시대의 소작인 신세와 비슷해졌다. 이것은 농부들이 씨앗의 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지,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농부의 정체성은 토지가 아니라 씨앗으로부터 나온다.

농부들보다 기술 우위에 있는 기업들은 농부들이 그들에게 의존할수록 이윤을 남기기 쉽다. 그들은 농부들에게 씨앗, 농약, 비료를 팔아 이윤을 남기므로, 농부가 스스로 씨앗을 관리하고, 해충의 천적이 서식하는 생태계를 보호하고, 퇴비를 만들어 토양을 활성화하는 일을 권장하지 않는다. 씨앗이 종자기업들에게는 지적재산으로서 고정자본이 되었지만, 그들에게 기술을 의존하는 농부들에게는 지적재산이 아닌 소모품이 되었다.

농부들에게 ‘1회용’ 씨앗의 유전정보는 고정자본이 아니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농업 엔지니어들이 농부들로부터 기술 주체성, 직업적 자긍심, 자본의 몫을 빼앗아 감으로써 자영농부들은 소작인이나 마찬가지인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농부들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모습은 씨앗의 지적재산권을 잃어버린 농부들의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국가나 국내의 자본이 씨앗의 지적재산권을 소유하면 식량주권이 세워질까? IMF 시절에 외국 자본에 빼앗긴 종자회사들 중 한두 기업을 우리 자본이 되찾아 왔다고 농부들이 살 길이라도 열린 것처럼 기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기업들은 언제든 외국 자본에 팔릴 수 있을 뿐더러, 국내 자본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농부들이나 농업생태계에 도움될 것이 없다.



씨앗의 권리, 농부에게 돌려줘야

씨앗은 농부들에게 주어질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다. 근대화 전까지 그랬듯이, 농부들은 유전정보들을 교환할 것이고 더 좋은 유전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농업생태계에 종다양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엔지니어가 아니라 농부들이다. 농부들의 집단지성이 씨앗과 농업생태계를 건강하게 조성하는 원동력이다. 농부들이 씨앗의 권리를 가질 때에만 플루흐가 주장하는 ‘농민농업’을 경영할 수 있다.

GMO와 기업종자가 우리의 먹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소비자를 비롯한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농부들에게 씨앗의 권리를 돌려줘야 한다. 농부들이 씨앗의 권리를 갖지 않고서는 농부로서 자립할 수 없고, 나라의 식량주권을 지키기도 어렵다. 국내 자본이 씨앗회사를 소유했다고 식량주권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농부들이 씨앗의 권리를 소유해야 참된 식량주권이 세워지는 것이다.

먹거리 운동 중에는 로컬푸드(Local Food) 운동이 있다. 생산한 곳에서 소비하는 곳까지 거리가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다. 먹거리 상품도 운반 거리가 멀어지다 보니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운반 거리가 짧을수록 좋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심은 GMO를 지역 시장에서 판매한다면 이것을 로컬푸드로 볼 수 있을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없었던 일이지만 미래에 생길 수도 있는 일이라면, 그러한 가정에 대한 철학적 답변은 지금도 할 수 있어야 한다.

GMO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업종자를 가까운 곳에 심는 일은 우리나라에도 많다. 필자는 로컬푸드를 운반 거리로 정의하는 것보다 씨앗의 출처로 정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다. 로컬푸드를 논할 때 운반 거리보다 중요한 것은 씨앗의 유전정보를 기업이 독점하고 있는지, 농부들이 소유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스미스가 주장했던 바와 같이 씨앗은 농부들에게 고정자본, 즉 지적재산이어야 한다. 농부의 농부에 의한 농부의 씨앗을 더 많이 만들고 확대해 나간다면, 농부의 자존감이 높아질 뿐 아니라 농업생태계와 시민의 건강도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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