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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고장 보성, 명량해전 군량미는 어디에서 왔을까?

-난중일기 ‘보성 조양창 창고 곡식은 그대로…’

조순익 기자 | 기사입력 2019/10/07 [03:49]

의병의 고장 보성, 명량해전 군량미는 어디에서 왔을까?

-난중일기 ‘보성 조양창 창고 곡식은 그대로…’

조순익 기자 | 입력 : 2019/10/07 [03:49]

 

▲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

보성군은 보성 조양현성(兆陽縣城) 유적조사를 통해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에 있는 조양현성이 조선시대의 체성 축조기법으로 지어진 군사 요새임을 밝혀냈다.

 

특히, 이번 조사 용역을 맡은 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는 지난 920조양현성 현지조사를 통해 내성 일부와 외성의 서벽·남벽·북벽일부, 성돌, 성곽 유구 등과 2개의 샘을확인해냈으며, 조양현성이 총 1.26둘레의 타원형 석성임을 알아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양현성에 대해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755척이요 높이가 7척이고 그 안에 우물 2개와 군창이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조선후기 사용했던 포백척 기준(46.73cm)으로 환산하면 조양현성 둘레가 1.26km라는 연구진의 조사결과가 충분히 뒷받침 된다.

 

보성군 조양창은 임진왜란의 일등공신 이순신 장군과의 인연도 깊어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난중일기’ 1597년 정유년 89일 기록 저녁에 보성 조양창(현 조성면 고내마을)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 곡식은 봉한 채 그대로였다. 군관 4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는 대목은 명량대첩으로향하는 조선수군의 군량미가 보성 조양창에서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양현성(兆陽縣城)에는 600석 규모의 군량미 저장소가 있었다. 보성군은 유적조사를 통해 발견된 우물 2군 데 중 한 곳을 이순신장군과 의병들이 이 샘물을마신 곳이라 하여 이장군 샘으로 명명하고 우선 복원하기도 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159789일부터 3일간 김안도의 집과 양산항() 집에 머물면서 최대성 장군과 송희립 장군을 만나기도 했으며, 조선 수군을 모집해 명량대첩의 기틀을 마련했다.

 

보성군은 수군을 폐하고 육군으로 합류하라는 선조의 명에 이순신 장군이 올린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금신전선 상유십이장계가 쓰였던 보성 열선루를 비롯한, 상유십이 공원, 이순신 장군이 전라 우수영을 향해 출항한 군영구미 등 보성의 역사문화자원을 연계해 조선수군과 보성의병의 활약상을역사문화 관광의 장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한편, 보성군은 임진왜란 때 700의병을 일으킨 죽천 박광전(1526~1597)선생과 전라좌도의병장 삼도 임계영(15281597) 장군을 비롯해 머슴살이 의병장 안규홍,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선생, 독립운동 선각자 송재 서재필 선생 등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의향의 고장으로 앞으로도 의병 역사 유적의 발굴과 복원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남도의병 역사를 알리고, 의병유적을 적극 발굴할 계획이다.

 


원본 기사 보기:전남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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