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석춘 칼럼
크리스천의 기복신앙
홍천뉴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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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29 [16:44]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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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나 장로, 권사가 빠짐없이 기도 중에 넣는 말이 축복기도이다. 축복중심의 신앙이 한국기독교의 기저에 깔려 있다. 기도와 은혜의 산물이 물질적 축복이나 난관의 타개, 신유와 치병에 중점을 두다보니 기독교의 십자가적 헌신이나 희생, 부활, 역사의 예언 등이 간과되고 있다.

 

 

 


인간은 너나없이 복을 받기 원한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복주머니 사진을 보내면서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교회에서도 연말 연초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한다. 연말만큼은 아니지만, 추석에도 같은 인사를 나눈다. 그러면 그런 복은 거저 굴러들어오는 것인가, 아니면 노력해서 얻어지는가?

 

성경에서는 복 받는 방법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나는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방법인데, 이렇게 기도하면 힘들이지 않고 쉽게 복을 받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뜻대로 산 결과로 복을 받는 방법인데, 이렇게 복을 받으려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 대부분 공짜를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대개의 교인들은 쉽게 복을 받으려고 기복신앙에 빠진다.

 

 

쉽게 받는 복

 

마태복음 7장에서 보면 예수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8)고 말했다. 그리고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다짐했다.

 

예수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손수 구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도와주었다. 그의 치유사역에서 보면, 로마의 백부장이나 수로보니게 여인 같은 이방인이라도, 예수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줄 믿고 자녀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구할 때, 그 자녀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그리고 나병환자가 예수가 자기의 병을 고쳐줄 줄 믿고 고쳐달라고 애원할 때, 그리고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믿고 그의 겉옷을 만졌을 때, 그들을 고쳐주었다.

 

구약에서도 야곱이 인생의 위기에서 복을 달라고 매달릴 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사기꾼이었다. 그래서 에서의 복수를 피해서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갔다가 이제 형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고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고 복을 달라고 애원했다.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그를 구해주셨다.

 

예수는 누가복음 18장에서 낙심하지 않고 힘써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비유를 들어서 가르쳤다. 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자주 가서 자기의 윈한을 풀어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그 재판관은 사람을 무시하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못된 사람이었지만, 그 여인이 자주 찾아와서 그를 귀찮게 하자 그 여인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예수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7)고 말했다.

 

교회에서는 이렇게 구하는 자에게 준다는 성경의 기록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진지하게 열심히 구하면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가르쳐왔다. 이런 것을 우리는 흔히 기복신앙이라고 말하는데, 기복신앙에서 주목할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보면, 샤머니즘의 뿌리가 깊은 우리사회에서 가족을 위해서 신령들에게 빌던 어머니들에게 전도하는 데에 기복신앙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기도의 열기가 교회부흥의 바로미터가 된다.

 

어느 미국 선교사는 미국 교회에 없는 한국의 새벽기도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는데, 우리의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수요기도회는 한국교회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기복신앙은 한국적인 현상이고 기복신앙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근본 문제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더 유의할 것은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이 샤머니즘의 토양에서 자랐기 때문에, 샤머니즘적이라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점이다.

 

신앙이란 믿음의 대상을 굳게 믿을 뿐 아니라 그 대상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는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예수의 가르침을 행하며 그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기복신앙인은 자기가 얻고 싶은 복을 위해서 기도할 뿐, 하나님의 뜻이나 예수의 가르침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안다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예수의 제자라고, 다시 말해서, 진정한 기독교인라고 말할 수 없다. 

 

 

노력해 받는 복, 수고 하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복은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명하시면서 그렇게 하면 그에게 큰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이 가라는 땅으로 갔고 그 결과 그의 자손이 창대해지는 복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그 큰 복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순종이 복의 전제조건이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불손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출 20:6)풀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노력을 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진다고 말하지만, 십계명에 따르면 은혜를 받을 만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진다.

 

말라기 3장에서도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10)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여기에도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소득의 십일조, 구제를 위한 십일조, 그리고 축제를 위한 십일조, 이렇게 세 가지 십일조를 바쳤다. 그런데 당시에 이 세 가지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힘겹도록 드릴 때, 우리의 수고를 가상하게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기복신앙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흔히 신명기 28장 3-6절을 인용한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그런데 이 구절 직전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1) 그리고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2)할 것이라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런데 기복론자는 모세가 반복해서 강조한 전제조건을 생략하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기만 하면 형통하는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신명기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소위 신명기 사관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28장에서 순종하는 자가 받을 복이 언급된 구절들 직후에 15절부터는 불순종하는 자가 받을 벌을 장황할 정도로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기복론자는 문맥을 무시하고 받을 복만을 강조한다.

 

성경을 왜곡하면서 복을 강조하는 것은 삼박자 축복을 내세우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삼박자 축복을 내세우는 사람은 요한3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1:2)는 구절을 그 근거로 삼는다.

 

요한이 이렇게 가이오를 축복한 것은 그가 진리를 증언하고 “진리 안에서 행한다”(3)는 말을 듣고 기뻤기 때문이다. 그는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4)라고 그의 기쁨의 이유를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삼박자 축복을 말하는 사람은 요한이 기뻐한 이유는 생략하고 믿고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세 가지 복을 주신다고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요한이 가이오에게 복을 간구하겠다고 약속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요한은 가이오에게 진리를 행한 네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단지 간구하겠다고 개인적인 관계에서 약속했다. 그런데 마치 요한이 확정적으로 말한 것처럼 혹은 하나님이나 예수가 복을 주기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설교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산상보훈에서 팔복을 말하면서 복을 받을 조건을 일일이 제시했다.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애통해야 위로의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야 천국을 차지하는 복을 받고, 예수를 위하여 온갖 환난을 받아야 상을 받을 수 있다.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어느 것도 수고 하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복은 없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예수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고 말했다. 그러면 구하지 않은 것들도 주겠다는 것이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복의 조건을 제시하셨던 것처럼, 예수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내세웠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때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가파르고 힘든 길이다.

 

성경에서는 반복적으로 행함이 없이 복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은혜를 강조한 바울도 로마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6)하신다고,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10)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할 때 세상의 빛이 되고, 빛을 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가족의 건강이나 사업 혹은 자녀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기복신앙에 근거한 것이니 삼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교인은 그러면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주로 그렇게 기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을 위한 기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기복신앙인이 비판받는 이유는 자신의 육신적인 복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일 경우에는 육신적인 복을 달라고 기도해도 될까? 논란의 핵심은 어떤 기도를 하느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바울이 복음전파를 하다가 병을 얻어서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가 육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육신이 강건해야 선교활동을 할 수 있으니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건강을 위한 기도를 권장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예수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를 한 후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육신을 위한 기도가 뒤따른다.

 

바울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주기도문에서도 육체를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기독교인의 자격이 없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복을 달라고 기도하면 그 기도는 샤머니즘적인 기복적 기도가 된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헌신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육신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가 그의 헌신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 기도는 권장할 만하다.

 

가장 우선하는 것은 예수의 참 제자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은 복을 달라고 기도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여기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는 예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의 삶을 닮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거룩한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5) 자라야 한다고 말했다. 바울이 푯대를 향하여 쉬지 않고 달린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를 바라보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힘써 달려야 한다.

 

그런데 목사들도 교인들도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육신의 복을 구하는 일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너나없이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대학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고,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교인들은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기복적 기도에 매달리고, 목사들은 교인들을 끌어들여서 교회를 키우려고 앞 다투어 기복신앙을 부추기고 있다.

 

예를 들면, 이구동성으로 목사들이 오만하다고 말한다. 오만하다는 것은 겸손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겸손은 예수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가르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손수 모범을 보여준 덕목이다. 그런데 오만한 사람, 다시 말해서,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바리새인처럼 이웃을 멸시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 역시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을 짊어졌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목사가 오만해서 바리새인처럼 이웃을 멸시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일이고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외면하는 일 아닌가?

 

그런 목사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이다. 믿고 기도하면 복을 받는다고 삼박자 축복 혹은 오중축복을 외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셔서 우리가 기도하면 이루어준다는 것을 믿자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우리가 빌면 모든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믿는 샤머니즘적 믿음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을 단지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을 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는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차이는 행함이 있느냐 빌기만 하느냐에 있다.

 

그런 기복신앙에 빠진 목사에게서 배우는 교인들이 예수가 가르친 대로 겸손해지겠는가? 이웃을 사랑하겠는가? 목사는 교인들의 롤모델이다. 그가 가르치는 대로 그리고 그가 행하는 대로 듣고 보고 모방한다. 그들은 목사처럼 말로는 사랑하자고 겸손해야 한다고 떠들지만, 사랑과 겸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겸손해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의 가르침은 찾아볼 수 없고 복을 달라고 매달리는 샤머니즘적 기복신앙만이 판친다. 이런 교회를 예수의 몸 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교회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기도하면 복 받는다고 열심히 가르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그래서 대형교회가 만들어지고 소형교회들이 유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복신앙의 맛을 본 목사는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렇게 너도나도 육신의 욕심을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한국교회에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목사들이 이사장이고 이사들이고 총장인 신학대학에서 이해타산에 의한 분규가 일어나고 고소고발 사건이 줄을 잇는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분란이 일어나고, 목사가 재판에 회부되고, 목사의 악행이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악한 일을 자행하는 목사의 편에서 내시노릇을 한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분별이 큰 교회에서는 외부로 나타나지만, 작은 교회에서는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실상 기복신앙은 한국교회 전체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기복신앙의 폐해를 직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지금 한국교회가 부패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기복신앙에 빠진 목사들과 교인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인격을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복만 구하는 기복신앙인은 샤머니즘 신자지 결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샤머니즘화하는 파국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기복신앙이 한국교회에 재앙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이 재앙을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열 명의 의인이 없던 땅처럼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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