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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결별했지만 여전히 ‘유대교 탄압’

<특집>루터의 두 얼굴 ‘어두운 그림자’

소정현기자 | 기사입력 2018/11/08 [00:47]

가톨릭과 결별했지만 여전히 ‘유대교 탄압’

<특집>루터의 두 얼굴 ‘어두운 그림자’

소정현기자 | 입력 : 2018/11/08 [00:47]

종교개혁 초기 선교적 관점에서 유대인에 관용 정책

후일 유대인 공동체 파괴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것

 

히틀러는 루터를 칭송 반유대주의 글들놀라운 집착

유대인의 인종말살 직간접 영향 부인할 수 없는 진실

 

유대인 탄압 역사는 그리스도 전파에 지대한 걸림돌

기독교인 유대인에 화해의 손길은 복음전파에 순기능

 

루터는 유대인 공동체를 파괴하여도 전혀 죄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선동이었다.  


 

종교개혁가 루터도 가톨릭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해

 

15세기부터 400년이 넘도록 스페인 등 유럽에선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하며 유대인들을 산 채로 불태우는 등 박해가 심했다. 종교개혁가의 근원이자 시발점이 되는 마르틴 루터(1483-1546) 역시 가톨릭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유대인 박해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유대인들은 수세기에 걸쳐 나그네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어디를 가도 눈총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로 부터 박해와 개종의 끊임없는 요구를 받아야 했다. 그것은 종교 개혁 시대에도 어김없이 적용 되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핍박하는 유대인의 생존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탄을 모르는 사람은 저들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토록 원한을 품고 있는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저들은 우리의 돈과 재물을 모조리 움켜쥐고 자기들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들은 고리대금으로 우리의 돈을 강탈하고 온갖 부류의 야비한 술수를 부린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만도 부족하여 아직도 그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메시야가 아니라고 공공연히 떠드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루터가 보기에 선택받은 백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과 마귀의 자식이었다.

 

루터는 그의 저서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Jews And Their Lies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의 회당(synagogues)과 학교를 불 지르고, 타지 않는 것은 땅에 묻어 흙으로 덮어서 그 흔적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라. 이 일들은 우리들의 신 야훼와 그리스도교의 명예를 걸고 하라!”

 

루터는 유대인 공동체를 파괴하여도 전혀 죄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선동이었다.

 

우리들과 나 또한 몰라서 과거에 유대인을 용납한 일에 대하여 야훼께서 우리들을 용서하시게 하라. 내가 충고하노니 그들의 집들을 모조리 다 파괴하라! 왜냐하면 그들의 집은 그들의 회당과 같은 용도로 쓰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핍박하는 유대인의 생존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유대인의 기도서와 탈무드에 관한 글들도 모두 압수하라고" 선동했다.   

 

그들의 기도서와 탈무드에 관한 글들도 모두 압수하라. 저들은 요망한 해석으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변조하고 알아볼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녀의 아들이라 부르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간음녀로 부른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해 가르칠 의무가 있다.”

 

베를린의 유대인 회당이 약탈당했으며, 결국 1572년에는 모든 유대인이 독일에서 추방됐다. 이 같은 유대인 박해는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가톨릭 신앙인들이 게토를 통해 유대인들을 가뒀다면, 개신교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을 빈털터리로 내쫓았다.

 

처음부터 루터가 유대인들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유대인에 가톨릭의 비우호적인 유산을 물려받았음에도, 루터는 그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등 매우 우호적이었다.

 

루터는 중세의 정서와는 차별화된 폭력 없는 유대인 선교와 유대인과 하나 되어 평화롭게 살아야 할 것을 호소했다. 심지어 그들이 기독교로 회심할 가능성도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우리의 형제로 여길 것이다.”

 

루터의 이러한 이해는 1532년 출간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나셨다.”(That Jesus Christ Was Born a Jew)에 나타난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친다면,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고, 그들의 아버지와 예언자와 족장들의 신앙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유대인들 가운데 미래의 기독교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친절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유대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세기 동안 가톨릭 신앙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유대인들이라면 가톨릭교회와 싸우고 있는 자신의 편에 서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결과적으로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또한 마틴 루터는 종교 개혁 초기에 유대인들과도 연합을 하려고 했지만, 그들의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는 율법적인 문제들로 인해 서서히 그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루터교의 수장인 그의 주장은 루터교의 본산인 독일의 크리스천들에게,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이것은 후에, 히틀러가 유대인의 인종 말살 정책을 세우게 되기까지의 직 간접의 영향을 미친 부인 할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사실 우리는 유대인 학살하면 히틀러와 나치만을 연상하지만, 그 이면에는 루터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증오심이 모아진 것이다.

 

 

중세이전부터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

 

비극적인 것은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본래 유럽 전역과 러시아, 대영제국에 퍼졌던 기독교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의 반유대주의는 중세에만 극성을 부린 것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존경 받는 교부들로부터도 그 뿌리를 깊이내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기독교의 신학을 집대성한 성 어거스틴(AD 354~430), “유대인들이 죽는 것이 마땅하지만, 대신 천벌을 받은 증인으로서 그리고 교회가 회당을 이겼다는 승리를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지구 위를 떠돌아다니도록 운명 지워졌다.”고 말했다.

 

실제 유대인들은 11세기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개종을 요구 받으며 무참하게 죽어가야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도 개종을 요구 받으며 13-14세기에 걸쳐 종교 재판을 받고 구금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하며, 추방을 당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유럽 지역의 모든 전설·민담·소설·연극 작품들을 보면 유대인은 모두 나쁜 사람, 수전노, 악덕 고리대금업자 등으로 묘사된다. 셰익스피어 베니스 상인에서 나오는 샤일록은 유대인이고 디킨즈의 소설 구두쇠 영감 스크루우지도 유대인으로 그려졌다.

 

▲  유대인들이 흑사병을 가져온 주범으로 몰려 그들이 살던 게토와 터전에서 쫓겨나고 화형에 처해지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세의 1347-1452년 사이에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해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는 일이 있었다. 당시 유럽의 인구가 7,300명 정도 였다. 그러나 페스트로 인해 무려 약 2,400만 명이 죽었다.

 

몸이 검게 타듯이 죽는다고 해서 흑사병(Black Death)이라고 불린 페스트는 치사율이 60%-90%까지 이르고, 이틀에서 칠일 이내에 생사가 결정 되었다. 위생 관념이 유럽인보다 강한 유대인들이 흑사병에 잘 걸리지 않자 유럽인들이 흑사병을 퍼트리는 악마의 종이 바로 유대인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이에 유대인들이 병을 가져온 주범으로 몰려 그들이 살던 게토와 터전에서 쫓겨나고 화형에 처해지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Joseph II, 1741~1790)는 관용 칙령(1781)을 통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제약들을 폐지했다. 1812년 프로이센에서도 소위 해방 칙령이 반포된다. 이로써 프로이센의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가진 어엿한 시민이 됐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도 얻었다. 군복무도 가능해졌다.

 

새롭게 패권국으로 부상한 영국도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영국 외교부가 스위스와 발칸반도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위해 이런 지시를 하달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처한 독특한 상황에서 벗어나 문명세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들을 보호하는데 노력하라.”

 

바야흐로 유대인 회복시대가 오는 듯 했다. 유대인들 스스로도 일반 사회에 편입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환상임이 곧 드러난다. 숟가락을 들려는데 밥상이 치워진다.

 

 

독일이 내놓은 답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히틀러는 나의 투쟁(Mein Kampf) 에서 루터를 독일의 가장 위대한 3명의 위인으로 칭송했다 


1914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일의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독일을 지지했다. 그들은 지난날 자신들을 박해했던 러시아를 조국 독일이 응징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내놓은 답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였다.

 

히틀러는 루터의 반유대주의 글들을 굉장히 익숙해 했고 아주 존경했다. 나의 투쟁(Mein Kampf) 에서 히틀러는 루터를 독일의 가장 위대한 3명의 위인으로 칭송했다.

 

루터로 인하여 히틀러가 유대인을 위한 최종 해결책이라는 미친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고 600만 대학살이라는 역사상 미증유의 사태를 불러왔다.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인 것이다.

 

히틀러는 유럽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더니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600만의 유대인이 학살됐다. 수많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몰아내어 죽음의 골짜기로 던져 버렸다. ‘참혹했다. 히틀러는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할 수 있는 악행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독일뿐만 아니고 유럽에서도 적극 지지를 보여주었는데 프랑스, 영국에서도 박수 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것은 유럽 전역에 만연한 기독교 국가의 이기심을 대변하였는지도 모른다. 유대인의 학살은 이미 예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증오심들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불살라진 것이다.

 

가톨릭·루터교이제는 화해의 손

 

가톨릭은 예수의 처형에 관여했다며 유대교와 2000년간 반목을 이어왔다.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로마 가톨릭의 규정은 대대로 반()유대주의자 교황들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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