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영화 ‘택시운전사’ 독일 기자가 직접 쓴 5·18 취재기

홍천뉴스투데이편집국 | 기사입력 2017/08/17 [12:32]

영화 ‘택시운전사’ 독일 기자가 직접 쓴 5·18 취재기

홍천뉴스투데이편집국 | 입력 : 2017/08/17 [12:32]
“고속도로 입구의 ‘출입통제’라는 표지는 우리에게는 경고와도 같았다. 그러나 김사복씨는 그걸 무시한 채 텅 비어 있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1980년 5월20일. ‘김사복’씨가 모는 택시를 타고 광주로 출발한 독일 기자 고(故) 위르겐 힌츠 페터는 직접 쓴 취재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영화 <택시운전사>속 한 장면. 광주에 진입하려다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

영화 <택시운전사>속 한 장면. 광주에 진입하려다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


계엄군의 수차례 통제를 뚫고 광주에 도착한 그는 ‘서툰 영어’로 “어젯밤 많은 친구들이 사살돼 병원에 치료할 만한 공간이 부족할 정도”라는 시민의 안내로 병원을 찾았다. 그는 “내 생애 한 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 꽉 막혀서 사진 찍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1980년 5월 광주를 취재하고 있는 힌츠 페터.

1980년 5월 광주를 취재하고 있는 힌츠 페터.


경향신문이 900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주인공인 힌츠 페터씨가 직접 쓴 5·18취재기를 살펴봤다. 그는 1997년 한국기자협회가 발간한 ‘5·18특파원 리포트(도서출판 풀빛)’에 ‘카메라에 담은 5·18광주현장’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5·18특파원 리포트’는 당시 광주 상황을 취재한 외신기자 8명과 국내 기자 9명의 취재기를 엮었다. 책이 발간됐던 그해 4월29일 5·18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아직도 가슴 깊이 담고 있는 광주 시민에게 나는 이 글을 바친다”고 시작하는 5·18취재기에는 광주를 직접 목격한 힌츠 페터의 고뇌가 그대로 묻어난다. 경향신문은 기자협회와 출판사인 ‘도서출판 풀빛’의 동의를 얻어 힌츠 페터씨의 취재기를 그대로 옮겼다.

■<힌츠 페터 5·18 취재기 전문>

카메라에 담은 5·18 광주 현장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아직도 가슴에 담고 있는 광주시민에게 나는 이 글을 바친다. 내 생에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최초의 엄청난 슬픔과 서러움이었지만,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져야 할 이 역사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을 나 역시 기록할 수밖에 없다. 먼저 나처럼 광주민중항쟁을 가슴 깊이 담고 있을 광주시민과 무고한 피해자들에 대한 나의 심정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자신의 죽음과 시신을 목격했던 가족들을 찍은 사진은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있으며,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17년 전에 있었든 그 일이 내게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각된다.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던 5월이라는 계절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계절이며, 생명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좋은 계절에 한국 국기인 태극기에 새겨진 원의 상징, 양과 음의 조화는 군부독재에 의해서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단지 한 육군 장성의 권력에 대한 야심 때문에 한국 군인들이 그들의 동족이자 친구를 죽이려 했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 당시 대중매체에서 일했고, 독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사건이 평화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웠던 작은 도시 ‘광주’의 상징으로, 전세계인에게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모든 영령들께 머리 숙여 경건한 조의를 표한다.

1980년 광주를 취재한 독일 기자 힌츠 페터가 촬영한 광주를 알리는 표지판. │광주시 제공.

1980년 광주를 취재한 독일 기자 힌츠 페터가 촬영한 광주를 알리는 표지판. │광주시 제공.


■광주사태 취재를 본사에 요청해 허락받아

1980년 5월19일 월요일 아침, 나는 광주를 비롯한 한국의 다른 도시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투쟁에 대해서 들었다. 순간 나는 ARD 함부르크 본사 뉴스센터에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내가 취재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센터에 전화했을 때는 불행히도 책임자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허락을 받기 위해 책임자의 집으로 전화를 하였다.

한국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면적인 언론통제를 감행한 후로는 한국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한 뉴스가 급격히 즐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우리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국의 자세한 상황을 알 만한 곳은 전부 전화를 했고, 한국과 직접 연락을 시도하려고 했다.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러는 중에 나는 많은 학생들이 군대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함부르크에 있는 본사에 전화를 걸어 새로운 사건과 불안정한 한국의 상황을 알렸다. 일본은 독일보다 8시간이 빠르기 때문에, 함부르크는 여전히 밤이었다. 편집국장은 전화로 취재 허락을 내렸다.

그러나 나는 사건 현장인 광주가 서울과 김포공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마감시간 안에 원고를 전달하기는 힘들거라고 말했다. 복잡한 상황에서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성능 좋은 통신위성도 없었고, 설사 그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위성을 이용한다면 한국 정부가 독일 언론의 취재 사실을 알아차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어려움을 돌파하고 뭔가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잃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내게 이 사건 취재의 허가가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인 기록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허락이 떨어진 후 나는 필름 편집자, 그리고 음향효과 담당과 함께 최소한의 촬영장비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현금만을 가지고 한국으로 곧장 출발했다.

이날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김포공항에서조차 세관원은 평상시처럼 장비검사로 시간을 끌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마치 언론매체와 TV 방송이 환영을 받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완벽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희한한 대접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한 번도 세관원에게 기대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토록 빠르게 통과되었다는 것이 너무 희한했다.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정치적으로 유동적인 상황이어서였을까?


■수차례 검문 끝에 광주진입 성공

우리를 안내할 차를 운전하기 위해 ‘김사복’이라는 한국 사람이 우리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로 서울시내 조선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센터에 알렸다. 당장 광주로 향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그날 밤은 조선호텔에 머물기로 하였다.

그때 한국 상황은 그 진행된 속도만큼이나 기묘해서 나는 우리 일행의 입국 사실을 정부의 외국인 취급기관 공무원에게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 엄중한 언론 통제가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들의 통제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단히 유동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낮 시간에 서울을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경험 많은 노련한 운전사 김사복씨도 역시 우리의 결정에 동의했다.

다음날 5월 20일 화요일 아침 일찍 우리는 서울을 출발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조선호텔에다 개인물폼 몇 가지는 남겨놓고 떠났다. 출발하기 전까지 입수된 최신 정보로는 서울로 오는 길이 모두 통제되고, 계엄군이 광주로 가는 모든 길목을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버스로는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취재를 포기하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쿄에서 온 또 한 사람의 독일인 취재기자가 우리와 동승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광주로 가는 데 기자로서 어떠한 특별대접도 받지 못할거라고 확인시켜줬다. 고속도로 입구의 ‘출입통제’라는 표지는 우리에게는 경고와도 같았다.

그러나 김사복씨는 그걸 무시한 채 텅 비어있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그 길은 마치 우리 앞길을 누군가 막고 나설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군데군데 우회로 표지가 계속 나타났지만, 김 기사는 광주로 곧장 달렸다. 나는 차 앞자리에 앉아 카메라 촬영준비를 한 상태에서 흥미롭게 차창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우리는 광주에서 75㎞ 떨어진 북쪽에서 멈추어야 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우리 차를 샅샅히 살피더니 순순히 보내주었다.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광주로부터 30㎞ 전방에 이르러 터널(호남터널)을 하나 만났다. 이 터널은 중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면서 모든 차량의 출입을 통제했다. 터널 앞에 이르자 군인들이 우리 일행을 멈추라고 했다. 적어도 15대의 탱크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몇 개의 기관총이 우리 차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군인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달리다 보니 푸른 들판에 둘러싸인 작은 시골마을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광주까지 남은 몇 킬로미터가 가장 어려운 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 곳곳에서 외국 언론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우리는 계엄군의 눈을 피해 광주로 갈 수 있는 샛길을 찾아 헤매야 했다. 가는 데마다 군인들이 쫙 깔려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모든 길이 통제된 상태였지만 광주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 이 군대가 가로막고 있는 저지선을 뚫고 광주로 들어가기 위해 고민하다 나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우리 일행의 책임자를 잃고 그를 찾으러 다닌다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그후 이 이야기는 일본의 외신기자 클럽에서 펴낸 신문(총 12권 중 5권째)의 맨 앞장에 실려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렸던지 군인들을 우리가 정말 잃어버린 직장 상사를 찾기 위해 광주로 들어가려 한 것이라고 받아들였고 우리는 그 어려운 관문을 마침내 통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힌츠 페터가 만난 시민군. │광주시 제공.

1980년 5월 광주에서 힌츠 페터가 만난 시민군. │광주시 제공.


■널려진 시신 보고 기가 막혀 촬영도 잠시 중단

우리는 낯선 국도에서 광주로 가는 길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 길은 모래와 돌과 여러 파편들로 부분부분 뒤덮여 있었고 바리케이드도 쳐져 있었다. 아마도 광주시민군이 시위하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짐작됐다. 노련한 운전사 김사복씨는 어렵지 않게 이 장애물을 통과해 길을 빠져나갔다. 이곳은 광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었다.

그때부터 대단히 조심스럽게 운전하기 시작했다. 차창 밖에 다는 내가 독일에서 챙겨온 독일 텔레비전 깃발을 꽂았다. 이 깃발이 계엄군의 차량과는 구별되기를 기원했다. 한참 후 부서진 유리창에다 태극기와 덜렁거리는 플래카드를 달고 다니는 시내버스 여러 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가 가고 있던 좁은 길 뒤로 다섯 명의 무장한 청년들이 지프를 타고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또 그 뒤로 젊은 학생들이 머리띠를 하고, 아무 막대기나 들고서 무기도 없이 큰 버스에 가득 탄 채 우리 앞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차를 멈췄고 그들 역시 차를 돌렸다. 그들은 우리를 무척 환영하는 눈치였다. 나는 학생들이 가득 탄 트럭으로 옮겨 탔다.

그들과 함께 시내로 들어가면서 동료인 헤닝과 첫 번째 사진 작업을 시도하였다. 트럭 맨 꼭대기에 탄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다른 버스에 탄 젊은이들은 모두 머리띠를 동여매고, 버스가 움직이는 리듬에 따라서 깃발을 매단 막대기를 마구 흔들고 있었다. 내 느낌으로 그들은 매우 고무돼 있었다. 우리 뒤에는 여전히 완정무장한 시민군의 군용 지프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광주시내의 어떤 널찍한 장소에 다다랐을 대 수천 명의 군중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그중 어떤 한 사람이 서툰 영어로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는 대단히 비통한 목소리로 어젯밤 많은 자신의 친구들이 사살되었고, 병원은 치료할 만한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부상자들로 가득 찼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야간 조준경을 갖춘 총으로 그들을 겨눌 때 그 앞에서 누구도 군인의 총탄을 피할 길이 없었음을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어 갔다. 누구도 그들의 총구 앞에서 숨거나 도망칠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시내에 있는 종합병원의 뒷마당으로 가면서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 마음속 한켠에 치밀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 광주시민들을 보면서 감동되었다. 병원 안에 줄줄이 놓여 있던 많은 관을 열어 그 들의 사랑하는 친구와 친척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대부분 어린 학생들의 시체였는데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 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 없었다. 가슴이 너무 꽉 막혀서 사진 찍는 것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옥상에서 광주 상황을 취재중인 힌츠 페터(사진 왼쪽). 전남도청과 가까운 전남대병원으로 추정된다. │광주시제공.

옥상에서 광주 상황을 취재중인 힌츠 페터(사진 왼쪽). 전남도청과 가까운 전남대병원으로 추정된다. │광주시제공.


■시장은 평온하고 과일 음식물도 많아

하얀색 글씨로 ‘희망의 80년대로’라고 쓴 길고 파란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깃발들은 건물 한 가운데 걸려 있었고 누군가가 영어로 그 의미를 통역해주었다. 이처럼 슬프고 고통스런 순간에 깃발 속의 슬로건은 냉소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그는 또 광주시 전역이 학생들과 시민들의 통제 속에 있다고 흥분조로 말했다.

나는 광주시 전체가 조망되는 높은 건물을 찾다가 완전히 파괴된 광주 MBC TV방송국을 지나치게 되었다. 열린 창문 속으로 큰 불이 난 흔적이 엿보였다. 나는 이러한 항쟁 초기의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광주시 전체가 전망되는 곳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하는 두 명의 미국인을 만났다. 나는 그들을 취재했다.

그들은 분노로 물들었던 이틀간의 광주 상황을 내게 설명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 옥상에서 그들은 군인들에 의해 광주시민들이 무참히 짓밟혔고 이로 인해 항쟁으로 치달았다고 말했다.

그들을 취재한 뒤 시계를 본 나는 당일 서울로 돌아가려면 속히 광주를 떠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와 동료들은 두 곳을 더 취재하기로 했다.

한 곳은 과일과 고기점이 늘어선 시장이었고, 다른 곳은 멀리 탱크들이 보이는 교차로 근처의 높은 바리케이드 장면이었다. 그러나 나의 긴 렌즈로도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엇다. 나는 주위의 크고 긴 통나무로 만든 바리케이드와 며칠 전 폭동이 있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전소된 군대 트럭을 찍었다.

시장에서의 모습들은 평온했다. 그 어디에도 슬픔과 불안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많은 과일과 음식들이 있었다. 정말로 온갖 종류의 음식들이 진열돼 있었다. 시장생활은 평상 때와 모습과 다름없었다.

나는 시장에서 잠깐 목을 축인 뒤 방금 찍은 노출된 필름을 조심스럽게 필름캔과 박스에 담았다. 물론 나는 내가 찍은 필름이 안찍은 필름처럼 위장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전날 찍은 다섯 개의 릴을 몸속 티셔츠와 셔츠 속에 숨겼다. 다른 필름들은 압수당하더라도 이것만은 꼭 살리고 싶었다.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연행되는 광주 시민들. │광주시 제공.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연행되는 광주 시민들. │광주시 제공.


■필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속에 숨겨

우리는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취재를 계속하기 위해 금요일인 23일 광주에 가기로 계획했다. 우리는 곳곳의 바리케이드를 지났고 잠시 후 군대통제 지역과 마주쳤다. 그들은 이번엔 모든 것을 세심히 조사했다. 군인들이 우리는 차에서 내리게 하고 찍히지 않은 필름으로 조사했다.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우리를 이내 보내주었고 다음의 몇 군데 검문소는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 22시간여가 소요됐다. 그때는 이미 도쿄로 광주에 대한 릴을 빼돌리기에 늦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본항공 소속의 1등석을 예매했다. 이유인즉 1등석 승객이 되면 의심을 받지 않고 내 물건이 손가방처럼 쉽게 통과돼 안전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필름을 금속캔 속에 포장해 과자더미 속에 숨겼다. 또 필름을 단단한 금속포장과 파란색 리본으로 화려하게 꾸며 선물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내 의도대로 공항관리들의 조사를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탑승한 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웠고 마침내 내 필름릴의 무사함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는 필름릴을 도쿄 주재 동료들에게 넘기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들은 즉시 함부르크의 뉴스센터에 필름을 전달했고, 나중에 알았지만 독일에서 몇 회에 걸쳐 방영했다.

그 필름은 또 유로비전과 미국에 제공됐다.

나는 3시간이 지난 5월22일 오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광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번에 광주시민들의 상황은 더욱 혼란과 불안속에 놓여 있었다. 학생위원회가 모든 광주시민들에게 무기를 반납하라고 요청했을 때 나에게도 뭔가가 일어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