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잃은 권력, 침묵을 선택한 사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방관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용석준 기자 | 입력 : 2026/04/30 [22:34]
부끄러움을 잃은 권력, 침묵을 선택한 사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방관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인간은 실수할 수 있다. 권력도 실패할 수 있다. 국가 역시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문제는 실수 자체가 아니다. 실수를 대하는 태도다.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권력은 스스로를 고칠 수 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잃은 사람은 스스로를 교정하지 못한다. 그는 사과 대신 변명을 선택하고, 성찰 대신 공격을 선택하며, 책임 대신 타인의 침묵을 요구한다.
동양의 고전은 이를 오래전부터 경고했다. 공자는 말했다. “의를 보고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 (見義不爲 無勇也) 맹자는 덧붙였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無羞惡之心 非人也) 이 두 문장은 하나의 사실을 가리킨다. 사회는 언제나 두 가지 힘에 의해 무너진다.
부끄러움을 잃은 자와, 그를 보고도 침묵하는 자.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더 큰 비극은 늘 ‘그 다음’에 시작된다. 기업의 회계 부정이나 대형 스캔들을 떠올려 보자. 처음에는 소수만 알고 있다. “이건 좀 이상한데…” “문제가 될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 일이 아니다.” “괜히 나섰다가 손해 본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 작은 침묵이 쌓인다. 그리고 어느 날, 조직 전체가 무너진다. 수많은 직원이 일자리를 잃고, 투자자는 모든 것을 잃고, 사회는 신뢰를 잃는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말한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역사는 이 고백으로 가득하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작은 왜곡이다. 사소한 거짓이다. 대수롭지 않은 책임 회피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순간, 그것은 기준이 된다. 부끄러움을 잃은 자는 점점 더 대담해지고, 침묵하는 사람은 점점 더 익숙해진다. 그렇게 사회의 기준선이 무너진다.
플라톤은 이렇게 경고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대가는 가장 저열한 자에게 지배받는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정치 비판이 아니다. 침묵의 결과에 대한 구조적 경고다.
20세기 대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를 더 냉정하게 분석했다. “악은 거대한 괴물의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자란다.” 우리는 종종 악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악은 평범한 선택 속에서 만들어진다. 모른 척하는 선택, 말하지 않는 선택, 그냥 넘어가는 선택. 그 선택들이 쌓여 결국 한 사회의 방향을 바꾼다.
엘리 위젤의 말은 더욱 직접적이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다.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강력하게 현상을 유지하는 힘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립이다.” 그러나 데스몬드 투투는 분명히 말했다. “불의 앞에서 중립은 없다. 중립은 결국 억압자의 편이다.” 이 문장은 불편하다. 그러나 정확하다.
지금 우리는 방관할 것인가, 아니면 책임질 것인가. 원하는 세상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 존엄과 존중, 공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행동하는 사람들의 용기 위에서만 비로소 시작된다.
권소영
강원동학21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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