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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의 여항 ... 용해숙 개인전

9월 4일부터 26일까지 아트스페이스 신사옥서

용석준 기자 | 기사입력 2024/08/22 [12:35]

파랑의 여항 ... 용해숙 개인전

9월 4일부터 26일까지 아트스페이스 신사옥서

용석준 기자 | 입력 : 2024/08/22 [12:35]

Yong Hae Sook 용해숙 龍海淑 

Visual artist born in Hongcheon, South Korea; lives and works in Seoul and Hongcheon.
시각예술가; 강원도 홍천 출신; 서울과 홍천에서 활동 중

 



지금을 쪼개고 다시 잇는 동안
 

남웅 (평론가)

 

파노라마

화면에 모든 걸 담아야 한다. 화각이 나오지 않는다면 방향을 바꿔가며 담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의 폭을 담는다. 하지만 프레임은 한정되어 있고 셔터는 동시적이지 않다. 누르고 또 누르는 동안, 시차마다 순간이 포착되고 분절된 단위가 매겨지는 동안 그것을 뺀 시간이 빠져 나간다.

 

그는 포착한 장면을 하나로 잇는다. 한 장의 사진은 바로 전에 찍은 다른 사진과 이어지며 부분의 풍경이 되고, 부분과 부분이 이어져 하나의 풍경으로서 파노라마가 된다. 파노라마는 분절된 화면을 잇고 엮으며 하나의 화면으로 다듬어져 나온다. 총합의 화면을 보기 위해 관객은 제 시선을 멀리 두거나 커다란 화면을 따라 말 그대로 서성이고 걸어야 한다.

 

파노라마는 동시적인 풍경을 염두에 두지만 그 과정에는 샷과 이어지는 샷 사이 시차와 다른 시간의 풍경을, 대기의 색조를 가둬야 한다. 머리를 조금 쓴다면 파노라마를 구성하는 단절된 화면의 시차를 역이용하여 특정한 상황과 서사를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두루마리 그림처럼 두루마리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서사의 흐름을 화면에 전개하거나,, 단절되듯 이어지는 풍경과 사물의 변형을 유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목적이 아니다. 그는 총체적 평면으로서 풍경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셔터와 셔터 사이 갭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는 간격을 최대한 짧게 둔다.

 

사진이 순간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순간을 연달아 포착하는 사진에서 풍경은 분리된 채로 다시 엮인다. 나뉜 자국은 최대한 마름질 되지만, 화각은 온전한 수평이 아니다. 삼각대를 설치하고 수평자를 사용해도 화면들이 다소간 왜곡된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를 최대한 평평하게 눌러 평면의 화면으로 동기화해야 한다. 모든 걸 담아야 하므로 어떻게든 넣어야 한다. 그러자면 파노라마에 최적화된 렌즈와 디지털 프로그램의 기능을 빌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기로부터 주도권을 뺏기는 일이며, 기기에 의해 왜곡된 형상을 다시 기기를 통해 왜곡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굴곡이 남을지라도 손에 쥐고 있는 기기의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며 손과 시선의 역능을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작가가 사진기와 같은 광학 장치를 활용하면서도 손길이 많이 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은 최종 화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럴진대, 보이지 않는 손들의 작업은 자동으로 보정하고 이어주는 프로그램과 어떤 점이 차별될까를 질문할 수 있다. 파노라마는 이미 널리 보급된 스마트폰 카메라에서 하나의 촬영 모드로 탑재된 데다, 드라이브 플랫폼들은 자동으로 비슷한 풍경의 사진을 파노라마로 이어붙이는 기능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도 용해숙 작가는 굳이 손이 많이 가는 방법을 고수한다. 그 결과 사진들은 렌즈 사양에 따라 굴절을 달리한다. 장소들은 평면을 지향하되 온전한 평면을 슬쩍 이탈한다. 평면이되 요철을 남긴 평면이 되어버린 풍경은, 어느 정도 수평을 벗어나면서도 평면임 직한 풍경을 펼쳐낸다.

 

사물들

찰나의 순간을 이어가며 공간을 담는 동안 사물들이 굴러들어온다, 아니, 사물은 작가의 연출 아래 선별되고 방치되며, 차라리 방치된 채로 배치된다. 근처를 돌며 채집한 쓰레기와 기성품이, 혹은 둘을 분리하기 어려운 어떤 ‘물건’이 버려지듯 놓이고, 버려진 화분과 가재도구들이 다시 한 번 널브러진 채 버려짐을 상연한다. 작가는 주변의 사물을 어떻게든 넣으려는 것처럼 배치하는데, 이 문장은 주객을 바꿔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 사물들은 어떻게든 포착되기라도 하려는 듯 화면에 산개한다.

 

작가가 10년 만에 열었던 2018년 전시의 이름 ‘너절한 변명’ 을 한 번 더 빌린다면(첫 인용은 곽영빈 평론가가 2019년 〈오래 매달리기와 수영강습 사이: 용해숙의 공사판 읽기〉에서 한 바 있다), 사진은 상품 가치와 사용의 시간을 다하고 버려진 ‘너절한’ 사물의 너절한 배치와 너절한 행위들을, 너절함을 숨기지 않는 기기와 손기술의 불안정한 조합으로 구사한다. 이는 마치 시야의 화면을 모두 담고 주변의 사물들까지도 품으려는 전능성을 가지려는 이가 애초에 그럴 수 없음을 의식하면서 작위적으로 불완전하고 급조한 듯 보이는 배치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대상과 경관을 시야에 포착하려는 시각의 욕망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까지도 교환가치로 포집하는 자본의 질서에 포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급과 싸구려, 버려지고 방치된 사물들을 한데 모아 산개하듯 배치하는 용해숙의 사진술은 이를 투박하게 전용하는 것으로 읽을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이른바 너절함의 전능함(Omnipotens, 그 반대는 가능할 수 없다. 전능함은 너절함까지 삼킬 것이므로) 혹은 비평적 너절함을(역시 그 반대는 가능할 수 없다. 이상적인 비평은 자신의 너절함까지도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므로)을 체화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다.

 

평평해진 풍경과 그 앞에 던져진 사물들, 현실을 담고자 하는 야망은 인화지에 무대를 펼친다. 프레임과 프레임을 잇고 시차의 우연까지도 포섭하고자 하는 하나의 화면은, 상황까지도 평평하게 눌러야 한다. 사진에서 인물들은 극적으로 제스처를 취하며 과장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을 예의 불완전성에 대응하는 의식적인 전략은 아닌가 하는 가설을 띄워두자. 다시 말해 특정한 상황을 연상하면서도 이를 평평한 화면 위에 담는 방식은, 그 상황의 맥락을 소거하는 전략으로, 작위적이고 드라마틱한 표현들로 펼쳐 보이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시선들

용해숙 작가는 사진술을 구사하면서 손길이 많이 가는 방식으로 장소와 사물을 선별하고 화면을 재구성한다. 매끄럽게 연결하고자 화면을 잇지만 온전하게 옮겨낼 수 없음을 암시하는 이는 예의 불완전성을 차라리 작위적인 상황과 소재로 펼쳐낸다. 하지만 이 작위성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포기함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가령, 인위적인 배치를 구성하면서도 작가는 되도록 인공조명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광을 최대한 담는 것 또한 그가 풍경을 담기 과정에 수반하는 미션이다. 하늘에 닿고자 했던 바벨탑처럼 실패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꿈의 현실을 알고 있는 이가 위악적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 이미 바벨탑은 무너졌고 일원론적인 문법이 해체된 지 오래지만, 작가는 애당초 쪼개지고 불완전함을 처절하게 인지하면서도 불가능한 꿈의 흔적을 놓지 않는다.

 

여기서 그의 다른 작업은 시공을 엮어나가면서도 누수 할 수밖에 없는, 나아가 누수와 왜곡을 미리 인지하는 사진술의 시선을 확장해서 이해할 단서를 준다. 가령 거울을 소재로 삼는 〈삼경 Three Views〉(2021)를 불러보자. 작업은 거울을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삼각으로 쪼개고 다시 사각의 전체 화면으로 재조합한다. 자르고 이어붙인 거울은 각진 예각과 둔각의 요철과 양감을 이룬다. 서로 다른 각도를 이루며 각각의 거울 면은 다른 방향의 풍경을 비춘다. 이를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다 - 풍경은 찢어지고 절합된 채로 거울에 들어온다. 관객은 정합적일 수 없는 화면의 총체를 마주한다. 비추는 장소를 쪼갤 뿐 아니라, 거울을 보는 당신의 모습까지 쪼갠다. 거울을 보기 위해 당신은 부서지고 이리저리 흩어져야 한다. 김남수 평론가가 환[幻]의 테크놀로지로 읽어낸 쪼개진 거울조각들의 총합인 ‘슈퍼 거울(super mirror)’은, 사진을 찍으며 시공을 분절하고 포획하는 이의 시선 또한 주변의 대상과 풍경을 포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서져야 함을 환기한다.

 

거울조각을 자세히 살피면 일부에서 미세한 틈새를 찾을 수 있다. 제각기 비추는 상을 방사하는 와중에도 시선과 시선 사이에 틈을 노출한다. 쪼개진 거울 오브제를 개념적 시선의 총체라 한다면, 이음매에 돌출한 작은 틈새는 우연한 기술적 실수나 벌어짐으로, 개념도 시선도 수습하지 못한 작가의 흔적을 누수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의도된 것일까, 마감의 실수일까, 혹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틈이 벌어진 것일까. 틈새는 개념적 시선을 물리적 구조를 노출한다. 하지만 그것은 질료와 제작방식을 유추하도록 하는 일 말고는 특별히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다(말해버린 순간 그것은 틈새를 봉합하고 그 과정에 다른 것을 누수할 것이므로). 봉합할 수 없는 틈새는 그것이 의도인지 우연인지 판단을 유예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출현한다.

 

〈삼경〉을 경유하면서 그의 사진을 어떻게 다시 읽을 수 있을까. 화면에 모든 것을 담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아는 이는, 시차와 한정적 프레임의 불균질함에 봉착한다. 어쩌면 작가의 거울 오브제는 풍경을 온전히 담지 못하는 이가 시공을 쪼개고 시선과 시선의 주체까지도 쪼개면서 파편적이나마 모든 걸 담아내는 체라도 하려는 속셈을 개념적으로 압축한 것은 아닐까. 사방에 널브러진 사물과 작위적인 인물들은 부서진 시선을 통과한 풍경의 우화이자, 애초에 불완전한 시선이 품고자 하는 전능성의 알레고리일지 모른다. 그리고 예의 우화적 속성은 슬쩍 종교적인 제스처의 도상을 내비친다. 각기 다른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의 손끝이 접촉의 도상을 촉발케 한다면, 다른 화면에 등장하는 이들은 행렬을 이루며 언덕을 오른다.

 

전능할 수 없음을 아는 사진술은 작위적으로 전능성을 연출하면서 그것의 작위성을 연출하며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보인다. 예의 연출들은 모든 것을 담고자 하지만 연출의 주체는 당연히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너절함을 연출하고 상연하는 일은 더 이상 너절함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염된 너절함이 매끈함으로 설명될 수도 없다. 너절함을 비평적 키워드로 삼으면서도 너절함 자체도 비평적으로 해체해내고자 하는 그의 작업은, 너절함과 온전함 사이에 어느 한쪽에 서기를 거부하면서도 두 쪽 모두에 지독하게 엮여 있는 회색지대를 펼친다. 그것은 어느 한쪽으로 쉽게 답을 내지 않고, 작가 또한 양 쪽 어디에 서서 어떤 기준을 두고 형상을 만들어내는지 불분명하지만, 보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드는 물결 속에서 파편으로 부서지는 각개의 얼굴과 사물과 풍경들은 서로를 이어간다.

 

추신1

버려진 것들을 한 번 더 부서뜨리고 조합해내는 평면의 풍경은,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다 - 당신의 손짓과 얼굴을 담지만, 사진은 당신을 읽을 수 없다. 당신을 어설프게 읽어내느니, 읽어낸 척을 하며 빼곡하게 읽은 흔적을 그러모은다. 당신을 담지만 내가 담은 것은 온전한 당신이 아닌 당신이 이미 빠져나간 자리, 당신의 부서진 흔적을 바득바득 모아낸 흔적이라 한다면, 그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작가는 이리저리 파도치며(波浪) 출현하는 꼬불꼬불한 골목길(閭巷)을 그려내는 듯하다.

 

추신2

대개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전에 섭외하지만, 드물게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을 담기도 한다고 전한다. 〈용의 길 - 고망난 돌〉은 제주 바닷가에서 현장을 지나는 홍콩의 육상부 학생들을 섭외하고 그들의 연기를 담았다. 엉뚱한 주문을 하는 작가와 낯선 이의 제안에 순순히 응하는 모델들. 샷과 샷의 시차는, 화면 바깥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만난다. 매끈하게 이어붙인 화면의 보이지 않는 틈새로부터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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