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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칼럼] 크리스마스날에 무엇이 보이는가?

크리스마스가 복이 되기 위해서는 볼 것을 봐야한다.

용석준 기자 | 기사입력 2022/12/20 [13:47]

[윤영호 칼럼] 크리스마스날에 무엇이 보이는가?

크리스마스가 복이 되기 위해서는 볼 것을 봐야한다.

용석준 기자 | 입력 : 2022/12/20 [13:47]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절기에 평상시 금기했던 신앙이야기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장사하는 사람은 대목을 보는 기회가 보이고, 감옥에 있는 사람은 특사나 사면의 기회가 보이고, 샐러리맨은 공식 휴일의 기회가 보이는등 사람들마다 성탄절에 느끼는 의미는 각양각색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를 바라보는 종교인들의 눈에는 무엇이 보여져야 할까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종교들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가 있고, 또 그 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진리, 즉 고유가치가 있습니다. 공유가치만 바라보거나, 고유가치만 바라볼 수 있는 눈이라면 반쪽만 보이는 외눈박이 일수밖에 없습니다.

 

7개국 언어를 알고 있었다는 독일의 언어천재 괴테는 말했습니다.

 

“하나의 언어만 알면 그 언어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종교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영국의 철학자 막스뮬러는 말했습니다.

 

“하나의 종교만 아는 것은 그 종교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이 말들은 비단 언어나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전반에 걸쳐 적용될수있는 보편적 진리 입니다.

 

항아리 속에만 있으면 항아리 전체의 객관적 모습을 알 수 없고, 항아리 겉만 보면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주관적 내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겉과 속을 다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직위나 외모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양쪽 모두를 보지 않으면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을 판단할 때, 상대의 상태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내 눈이 색맹인지, 내가 지금 선그라스(감정이나 선입견)을 끼고 있는지, 내가 지금 절박한 강박상태나 불안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객관적 진단이 없는 상태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시각이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빨간 안경을 끼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상대에게 왜 빨가냐고 말하는 것은 황당함 그 자체이니까요.

 

필자가 중동지역에 근무할 때, 자칭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부르는 중동지역사람에게 ‘예수는 누구냐’ 고 물었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이나 이슬람교를 믿는 여타중동인들은 그를 ‘굿 랍비’ 즉 위대한 스승, 위대한 선지자라고 답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로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뜻입니다. 즉 구원의 통로가 되는, 다시 말해 구세주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성탄절의 주인인 그분의 정체성과 그 분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그가 세상에 전해준 메시자가 바로 기독교의 고유가치입니다. 아직까지 그 고유가치를 보지 못하면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은 유니폼만 입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신의존재를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인 사람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인간의 논리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기에 감지능력이나 계시나 상상처럼, 객관성이 입증되지 않은 것들에 의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침묵언어로 채워진 이 우주의 광대함만 바라보면 우리는 더 왜소해질 수 밖에 없고, 내가 태어나기전부터 있었고 죽은 후에도 있을 끝없는 시간을 상상하면 나의 존재는 그야말로 찰나의 존재요, 우주에 고아처럼 나뒹구는 먼지로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내가 왜 여기에? 왜 지금? 왜 이런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인지? 내가 상상하는 것이 진정 맞는 것인지? 깜깜 오리무중으로 공허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막막한 인간세상에, 우리 눈높이에 맞춰서 인격적 형상으로 크리스마스 메시지가 전달되었으니 곧 ‘우주의 본질은 무한한 사랑(Endless Love)’이라는 것이지요. 그 사랑의 본질이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왔고, 그 자리에 우리를 초청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곧 크리스마스의 고유가치요 의미입니다. 그동안 인간의 감성과 무관하게 물리법칙과 무정한 힘으로만 느껴왔던 공포스런 절대 힘 세상에, 독특한 방식의 반전가치, 사랑메시지가 전해진 것입니다.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느냐구요?

 

비유로 전달된 메시지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선한 사마리아 비유와 탕자의 비유입니다.

 

어떤 이는 강도만나 벗겨진 채 쓰러진 사람이 옷이 없기에 그의 신분을 알 수 없다는 사실만 눈에 들어왔지만, 어떤이(선한 사마리아인)는 옷이 없기에 그가 지금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안목이 바로 우주의 본질(로고스) 메시지 입니다. 그 메시지의 DNA가 있는 사마리아인 이었기에 강도만나 벗겨진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해줄 수 있었습니다.

 

또, 아버지자체 보다 아버지가 가진 재산이 더 중요했던 불효자식 탕자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고 받아주는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이 바로 하늘의 마음이라는 비유입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고 했던 것을 요즘은 ‘탕자에 대해 무한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 비유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맥락을 보는 안목이 확장되었기에 비유제목도 더 합당하게 불려지는 것이지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날입니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나는 지금 공유가치만 보고 있는가? 아니면 고유가치도 보고 있는가?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늘의 메시지를 보지 못한 채, 절기행사만 하는 종교인이라면 세뱃돈이 설날의 전부로 알고 있는 어린아이나, 초상집에 가서 싫컷 함께 울어주고나서 누가 죽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나 같지 않겠습니까?

 

외눈박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편견의 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시력이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크리스마스에 전해오는 하늘 메시지, 즉 “제한없는 사랑(Endless Love)”메시지를 몸에 지닌 진짜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그 메시지가 바로 사도바울이 지녔다고 하는 흔적 아니겠습니까?

 

내 소견대로 겁 없이 애매하게 남을 판단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시력을 교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전해오는 하늘의 메시지가 내게 전해지는지 묵상하면서 오늘을 보내겠습니다.

 

 

윤영호

칼럼니스트(시인, 수필가, 홍천군지속가능발전협의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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