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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샘의 홍천문화 탐방 57. 강원 홍천 서석의 동학농민운동 이야기

김동성 기자 | 기사입력 2022/11/14 [15:43]

김샘의 홍천문화 탐방 57. 강원 홍천 서석의 동학농민운동 이야기

김동성 기자 | 입력 : 2022/11/14 [15:43]

 

보국안민의 깃발 아래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홍천군 서석면 동학 이야기는 농민군에 참가했다가 10월 23일 홍천 서석 전투에서 희생된 최도열의 증손으로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 홍천우체국장과 현 동학혁명 유족회 홍천지부장을 맡고 있는 최낙인씨의 강의를 듣고 작성했습니다.

 

동학혁명 피해자 후손 최낙인 강의 모습 

[동학혁명 피해자 후손 최낙인 강의 모습]

 

1894년 9월 4일 강원도 농민군은 대관령을 넘어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삼정의 폐단을 뜯어 고치고 보국안민의 개혁을 수행하려던 농민군은 보수 민보군의 반격으로 다시 대관령을 넘어 퇴각하였다. 곳곳에서 해산하지 않고 투쟁을 전개하던 농민군들 가운데 한 세력이 10월 1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보수 지배세력은 농민군에 대해 적극 반격을 개시하였는데, 경기도 지평의 감역 맹영재(孟英在)는 포군을 이끌고 홍천의 농민군을 향해 진격해왔다. 이에 맞서 농민군은 10월 21일 맹영재 부대와 장야평[장평]에서 전투를 벌이고 서석으로 후퇴하였다. 서석에서 후퇴한 농민군은 풍암리 구릉 위에다 진을 쳤다. 다음날 10월 22일 서석에 집결한 농민군은 맹영재가 이끌고 온 민보군에 맞서 800여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는 처절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최낙인씨의 증조할아버지 최도열은 이 서석 전투에 참가했다가 희생되었다. 손자 최주호(최낙인의 부친)가 그날의 서석 전투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으나, 1992년 돌아갔다. 그는 홍천 일대, 특히 서석 전투를 상세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던 마지막 분이었다. 그 아들 낙인(최도열의 증손)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둘 걸 하면서 안타까움을 전했다.

 

할아버지(도열) 가족들은 동학을 믿었고, 천석꾼이라고 할 정도로 살 만하여 최도열은 수백 석의 군량미를 농민군에게 제공하였고, 전투에도 직접 가담하여 전사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집안은 어린 아이 셋만 남기고 남자는 거의 다 희생당했으나, 다행히 그의 아버지와 부인이 아들(규백)을 데리고 몸을 피할 수 있어 대는 끊기질 않았다고 한다.

 

서석 싸움은 1894년 10월 22일에 벌어졌고 족보에 도열이 죽은 날은 10월 23일로 되어있다. 최주호(최낙인의 부친)는 어렸을 적에 증조할아버지가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에게 들려준 할아버지의 생활과 농민군의 활동 모습을 전해 들었다. 농민군이 주둔하였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구릉 산자락을‘진등’이라고 부르는 데 의병[농민군]이 진을 친 곳이기에 언덕을 진등이라 불렸다고 한다. 농민군이 싸울 때,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로 총을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도 했고, 주문을 외우면 저들의 총에서 총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신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도 하였다. 농민군들이 소를 잡아 껍질 네 귀퉁이를 말뚝에 묶어놓고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그렇게 하여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진등을 넘는 고개 이름이 자작고개인데, 이는 그날 쓰러져간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도 하고,‘동학난리’때 사람들이 고개를 자작자작 넘어가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홍천 서석면 동학농민군 최대 격전지-자작고개 

[홍천 서석면 동학농민군 최대 격전지-자작고개]

 

증조할아버지인 최도열이 살던 그 마을에서 태어난 최낙인은, 어렸을 때의 마을 분위기를 이렇게 말한다.“국민학교 시절 여름 장마철이면 마을 어귀 언덕은 온통 수렁으로 변했습니다. 귀퉁이가 무너져 여기저기 뼈다귀가 튀어나오고요. 지금 위령탑이 선 곳이죠. 밤이면 도깨비불이 번득여 나다니기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때는 마을 아이들 누구도 그 뼈가 누구의 것이며 왜 거기에 그리 많이 묻혔는지 아무에게서도 듣지 못하고 자라왔지요.”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고갯길 확장공사를 하던 중 인골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희생자가 800여 명이 넘었던 홍천 서석 전투인지라, 이때 희생된 일가친척이며 동네 사람의 수가 엄청나서 1970년대 중반까지도 마을에는 음력 10월 22일 한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30여 호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농민전쟁에 참가했던 주민들은 그 후 탄압과 감시를 피해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한 집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곳

 

강원도는 동학과 매우 밀접하다. 동학이 많은 탄압 속에서도 성장하고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주역이 되기까지 강원도는 동학과 함께했다. 최시형과 유족들이 관군의 추적으로 어려움이 처했을 때 강원도는 피난처 역할을 해줬고,최시형은 오랜 꿈이었던 동경대전까지 인제에서 간행할 수 있었다.[최시형은 1880년 5월 9일 인제 갑둔리 김현수의 집에 각판소를 설치, 5월 11일부터 간행작업을 시작해 6월 14일‘동경대전’100권을 완성 전국으로 배포했다]

 

최제우의 제자들이 여러 곳으로 유배됐는데 이경화가 1864년 영월 소밀원으로 오며 강원도에 동학이 알려졌다. 그가 원주 출신 장기서에게 처음 포덕했고 양양,인제, 정선, 영월, 평창 등지를 다니는 상인들을 통해 영동까지 세력을 확대, 양양과 영월이 1870년대초 강원도 동학의 거점역할을 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인 1898년 4월 6일 관의 눈에 피해 피신해 있던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된 곳이 원주 송골 최시형 피체지이다. 최시형이 피체된 곳이 원진녀의 집이며, 2008년에는 그동안 빈 터만 남아 있던 곳에 생가를 복원하여 두었다. 마을 입구의 기념비(1990년 4월 건립)에는 “모든 이웃의 벗 崔보따리선생님을 기리며”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崔 보따리’라는 별호는 최시형이 항상 작은 보따리를 가진 행장으로 방방곡곡을 다니며 민중에게 동학의 가르침을 전하고 그들과 동고동락(同苦同 樂)하였기에 민중들이 그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홍천에도 상당수의 동학도들이 있었다. 특히 차기석은 농민수탈의 상징이었던 동창을 갑오년 10월 야밤에 습격해 불태우면서 혁명의 서막을 알렸다. 홍천의 동학농민혁명군은 화촌면 장야촌에서 진압군과 처음 접전을 벌였으나 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솔치재를 넘어 서석으로 후퇴했다.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전투는 800여명이 희생된 동학혁명전투 중 가장 참혹한 전투지다. 차기석은 강원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1000여명을 이끌었다. 이들은 서울로 진격해 최시형의 총기포령에 따라 권문세가를 멸하고자 했으나 자작고개를 넘지 못하고 산화했다.

 

동학혁명군충혼탑에서 홍천의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과 함께

[동학혁명군충혼탑에서 홍천의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과 함께]

 

농민군의 최대 격전지였던 자작고개에 동학혁명군전적지를 조성하였으며, 홍천군 풍암리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22일에 이곳에서 기제사를 지내고 있고, 1977년 11월 28일 강원도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1894년 5월 11일 동학농민군이 전북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과 처음 싸워 크게 이긴 황토현 전승일을 동학농민 법정기념일로 정하고(2019년)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기 위한 국가기념일로 정식 지정되었다.

 

최규백이 잠들었던 항아리 

[최규백이 잠들었던 항아리]

 

홍천 풍암리 자작고개전투시 무참히 살해하는 관군들의 수색에 황급히 피신해야 했던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돌잽이 아기를 쌀독안에 숨겨두고 뒷산에 피신했다 이틀 뒤 돌아와 보니 그 아기가 무사했고 그 아이가 생존하여 전주최씨 대를 이은 분의 손주가 얼마전에 은퇴한 홍천우체국장 최낙인씨였다. 바로 그분의 역사이야기도 직접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은 끝났지만 행여나 역도로 고발되어 유가족이 피해볼까 우려해서 불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막아 놓고 제사를 지낸 일, 심지어 자기 성도 바꾸고, 기록도 증거도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의 엄연한 역사, 동학농민혁명도 우리의 미래를 바르게 열어가는 교훈의 산실이다. 농민도 관군도 모두 우리의 조상이다. 부패하고 어리석었던 우리 조상의 역사속에서도 우리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고, 그 교훈을 후손에 전수하여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살아있는 역사를 이어가는 우리의 마땅한 일일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공원 전적비 

[동학농민운동 공원 전적비]

 

풍암리 자작고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현재 강원도기념물 제25호로 관리되는 동학혁명군 위령탑과 그 일대를 홍천군민 모두가 하나되어 국가사적지로 승격시켜 풍암리 동학혁명 농민군 전투의 역사적 가치를 잊지않도록 해야겠다.

 

※ 홍천문화재 탐방은 필자가 2021년 홍천문화원에서 운영하는 마을관광해설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역사적 사실, 강의에서 논의되었던 내용, 현장답사를 하면서 남겼던 기록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혹시 왜곡되었거나 잘 못 알고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수정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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