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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샘의 홍천문화 탐방 32. 수타사(壽陀寺) - 봉황문과 소조사천왕상 이야기

김동성 기자 | 기사입력 2022/09/24 [09:42]

김샘의 홍천문화 탐방 32. 수타사(壽陀寺) - 봉황문과 소조사천왕상 이야기

김동성 기자 | 입력 : 2022/09/24 [09:42]

 

                                                                     봉황문 전경[봉황문 전경]

 

수타사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1688년에 쓰여진 홍천현동공작산수타사사적(洪川縣東孔雀山水墮寺事蹟)에 의하면 1674년 법륜(法輪)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양식으로 봉황문(鳳凰門)을 만들고 이후 숙종 2년(1676) 여담(汝湛)이 흙으로 사천왕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봉황문 안에는 크기 3.2m에 이르는 대형 소조(塑造 : 진흙을 바닷물에 6개월 동안 숙성)로 제작된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칼을 든 동방지국천왕, 망구스와 보당을 든 서방광목천왕, 여의주와 용을 든 남방증장천왕, 비파를 든 북방다문천왕으로 되어 있고, 각 천왕상은 중국식 갑옷을 입은 용맹스런 무장(武將)의 형상에 두 다리를 딱 벌린 채 의자에 걸터앉은 듯한 좌상의 자세를 취했으며, 발아래로는 악귀(惡鬼)들을 밟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곤두세운 이마, 부릅뜬 눈, 뭉툭한 주먹코, 악다문 입 등 사천왕 특유의 험상궂고도 위협적인 분노상이 특징적이다. 옷차림은 평상복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갑옷을 이중으로 걸치고 있는데, 팔뚝 소매가 위로 말려 올라가 바람에 휘날리듯 표현되고 있다. 머리 뒤에서 양 발끝까지 천의(天衣) 자락이 둥글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여기에서 화염 가닥들이 뻗어 나와 일종의 광배(光背) 구실을 하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사천왕상은 임진왜란 이후 사찰 복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에 함께 이루어졌으며, 지역이나 제작연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의승군(義僧軍)과 관계가 있는 사찰에서 많이 제작되고 있어 호국호법의 염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수타사의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형식과 양식 변천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동방지국천왕] 

 

1957년 이곳 수타사 사천왕상 해체 수리 시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의 배에서 복장유물로 세조의 ‘월인석보 17, 18권’이 수습돼 유명해진 수타사 사천왕상이다.

 

 

[동방지국천왕의 손이 못에 박혀있고 철사에 감겨있었다.] 

 

문제는 봉안된 사천왕상 중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의 오른손에 쥐어진 칼의 위치가 복원 전, 손등이 아닌 손 밑으로 잘못 복원된 것이다. 그리고 잘못 복원된 칼이 아래로 쳐지자 못과 철사로 칼을 고정시켜 놓았었다.

 

 

 

 

지금 수타사 사천왕상은 단청작업을 하고 있으며 동방지국천왕의 칼을 빼 놓은 상황이다. 지난 9월초 홍천문화원 홍천학연구소, 너브내역사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사천왕상 복원현장을 방문하여 복원상황 설명을 듣고 홍성익 강원대 교수의 자문을 받아 동방지국천왕의 칼의 위치를 원래대로 복원하기로 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원형과 다르게 변형된 문화재로 복원시켜놓았는데도 책임지는 사람들은 없다. 하루빨리 원형대로 복원 되길 바래본다. 수타사 사천왕상은 1998년 9월 5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 홍천문화재 탐방은 필자가 2021년 홍천문화원에서 운영하는 마을관광해설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역사적 사실, 강의에서 논의되었던 내용, 현장답사를 하면서 남겼던 기록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혹시 왜곡되었거나 잘 못 알고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수정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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