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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샘의 홍천문화 탐방 20. 홍천용씨 용득의를 만나다.

김동성 기자 | 기사입력 2022/09/11 [09:44]

김샘의 홍천문화 탐방 20. 홍천용씨 용득의를 만나다.

김동성 기자 | 입력 : 2022/09/11 [09:44]

 

 

용득의(龍得義)는 홍천 용씨(洪川 龍氏)의 시조로 고려시대 몽고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려 했던 팔만대장경을 각판(刻板)하는 불사(佛事)를 지휘한 인물이다. 고려가 몽고지배를 받자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홍천군 금학산에 용수사를 세워 불전전수와 불교전파에 여생을 바쳤다. 용득의는 원래 유학자였다. 경학(經學)에 박통했고 문장은 맑고 우아해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존경받았다.

 

 

팔만대장경판(2021년 10월 홍천문화원서 학술세미나 전시)

 

 

용득의는 희종 때 시어사를 거쳐 고종 28년(1241)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는 꾸준히 대몽항쟁을 주장했다. 평소 불심이 깊었고 몽골의 침입을 불심으로 막아보려는 의미로 고종 23년(1236)부터 16년 동안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각판하는 불사(佛事)를 총지휘하여 강화와 진주를 오가며 착수한 지 16년만인 1251년(고종38) 9월, 장판8만1258장, 6589권의 고려대장경이 완성되어 어전에서 봉정식을 가졌다.

 

 

[홍천을 공부하는 분들과 2021 부처님 오신 날 용수사터 탐방]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뒤 38년이 지나 개경으로 환도한다. 강화를 발판으로 항전을 고수했던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찾자는 문신들에 의해 이듬해 몽골과의 화의가 성립된다. 그러나 끝까지 항몽사상을 버리지 않았던 용득의는 몽골과의 굴욕적인 화의에 실망해 관직을 버리고 강화에 머물던 그가 만년에 강원도 홍천에 내려와 용수사란 절을 세우고 그 절 가까이 학서루(鶴棲樓)를 지어 불도들을 위한 수련장으로 사용하는 등 홍천 땅에서 불교 전파와 경서 등을 가르치다가 원종 14년(1273) 무렵에 세상을 뜬 것으로 어림 잡힌다.

 

 

 

 

홍천군 덕치리에 있는 화산재(花山齋)는 홍천 용씨 시조 용득의(龍得義) 이하 9세조까지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 3일 시제를 올리고 있다.

 

 

 [홍천용씨 족보]

 

※ 홍천문화재 탐방은 필자가 2021년 홍천문화원에서 운영하는 마을관광해설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역사적 사실, 강의에서 논의되었던 내용, 현장답사를 하면서 남겼던 기록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혹시 왜곡되었거나 잘 못 알고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수정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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