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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타사 창건 당시 기록에만 있던 우적산(牛跡山)의 정확한 위치 밝혀져

김동성 기자 | 기사입력 2022/07/24 [15:19]

수타사 창건 당시 기록에만 있던 우적산(牛跡山)의 정확한 위치 밝혀져

김동성 기자 | 입력 : 2022/07/24 [15:19]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박사의 홍천을 노래한 시(時,) 홍천을 기록한 문(文) 특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수타사(壽陀寺)는 708년(성덕왕 7)에 창건되어 우적산(牛跡山) 일월사(日月寺)라 하였으며 영서지방의 명찰로 손꼽혀 오다가 1568년(선조 2)에 현위치로 이건(移建)하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동안 우적산의 위치를 정확히 몰랐었는데 필자가 홍천문화원 마을관광해설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박사의 '홍천을 노래한 시(時) 홍천을 기록한 문(文)'에서 안석경의 삽교집에 나오는 금강산 유람기에 안석경이 수타사를 지나면서 쓴 글에 옥수암은 우적산 아래 있는데로 기록하였고 또 우적산을 넘었는데, 우적산은 공작산 자락이다.라고 기록한 사실을 발견했다.

 

 

 

 

 

癸酉. 往玉水菴. 菴在牛跡山下, 新其舊而敞之, 丹碧爛然. 有泉出於菴後石壁, 甘冽可食.

 

계유. 옥수암(玉水菴)으로 갔다. 옥수암은 우적산(牛跡山) 아래 있는데, 옛 암자를 신축하여 넓였으며 단청이 화사하였다. 암자 뒤의 석벽에서 샘이 흘러나왔는데 달면서도 차가워 마실 만하였다.

 

甲戌. 踰牛跡山, 山卽孔雀之餘也. 過東幕里‧屈雲里‧三汀浦. 浦下流盪磨回崖, 崖多花木. 憩一乾坪. 踰馬峴, 歷泉甘驛. 西北見葛異山, 石峯崷崒, 信爲洪川之望. 宿南德谷. 是日行六十五里.

 

갑술. 우적산(牛跡山)을 넘었는데, 우적산은 공작산(孔雀山) 자락이다. 동막리(東幕里)‧굴운리(屈雲里)‧삼정포(三汀浦)를 지났다. 삼정포 아래 흐르는 물은 요동치면서 벼랑을 깎아내며 굽이졌고, 벼랑에는 꽃과 나무들이 많았다. 물기가 없는 평평한 곳에서 쉬었다. 마현(馬峴)을 넘어 천감역(泉甘驛)을 지났다. 서북쪽으로 갈이산(葛異山)이 보였는데, 석봉이 높고 험준하여 참으로 홍천(洪川)의 상징이 된다. 남덕곡(南德谷)에서 묵었다. 이날 65리를 갔다.

 

 

[현재의 옥수암]

 

옥수암은 지금 수타사 건너편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 있다. 바로 옥수암 뒷산이 우적산(牛跡山) 인 것이다.

 

안석경(安錫儆)은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삽교(霅橋). 홍천과의 인연은 아버지 안중관(安重觀)이 영조 14년(1738년) 홍천현감으로 부임하자 2년간 홍천에서 머물렀다. 당시 안석경의 나이는 21살이었다. 1752년(영조 28)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이곳저곳 아버지의 임소(任所)를 따라 생활하였다. 당시 신흥도회가 형성된 홍천·제천·원주 등이 그 곳으로 청년기를 이러한 도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명예나 권력을 좇는 무리들이 날뛰는 환로(宦路)에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아니고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사회현실 속에서 심한 갈등을 하게 된다. 결국 세 차례 과거에 응하지만 모두 낙방하였다.

 

출세지향의 공부에 힘쓰지 않았던 그에게 낙방은 오히려 당연하기도 하다. 1752년(영조 28)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霅橋, 덕고산 근처))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는 처사적인 생활이었다. 그의 저술로는 시문을 모은 삽교집, 사실과 견문을 모아놓은 삽교만록, 중국과 우리나라 시문작품을 비평한 삽교예학록 등이 대표적이며 현전하는 한시는 400수에 달한다. 금강산 유람을 적은 동행기와 동유기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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