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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10] 사찰(寺刹)과 향교(鄕校)

향교는 관아 2리 안팎에, 사찰은 깊은 산중에 있는 사연은?

용석춘 기자 | 기사입력 2021/03/08 [19:08]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10] 사찰(寺刹)과 향교(鄕校)

향교는 관아 2리 안팎에, 사찰은 깊은 산중에 있는 사연은?

용석춘 기자 | 입력 : 2021/03/08 [19:08]

  향교는 관아 2리 안팎에, 사찰은 깊은 산중에 있는 사연은?

 

▲    1955년 6.25전쟁 직후 수타사의 모습  출처 홍천군청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의 큰 변화 중 하나는 억불숭유 정책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불교를 억누리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폈다. 고려의 부패 원인을 타락한 불교에서 찾으면서 조선 건국의 명분 중 하나로 삼았다.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고, 유교는 조선의 새로운 국교로 자리 잡았다. 불교는 사찰로, 유교는 향교로 대중들과 접점을 찾았다. 조선 시대 향교는 늘 관아 근처에 있었다. 반면 사찰은 깊은 산중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 시대 억불숭유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사찰을 기록한 홍천읍지는 『세종실록지리지』와 『대동지지』를 제외한 11개다. 그리고 11개의 홍천읍지에 모두 기록된 사찰이 수타사다. 수타사는 104칸이며 관문으로부터 동쪽 20리 공작산 서쪽 산기슭 아래 있다고 적었다(水墮寺 一百四間 自官門東距二十里 孔雀山西麓下. 여지도서). 수타사 서쪽 끝에는 8칸 옥수암이 있다고 보충했다(西至玉水庵 八間. 여지도서).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화산현지』와 백원정사 필사본인 『홍천현 읍지』에서는 수타사가 현으로부터 동쪽 15리에 있다고 적었다.

 

『강원도지』는 수타사의 창건과 변화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수타사는 동면 공작산에 있다. 신라 성덕왕 무신년(708년)에 원효조사가 창건했다. 일월사로 이름을 지었다. 조선 선조 임진년(1592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인조 병자년(1636년)에 공잠 스님이 대적광전을 건립했다. 효종 경인년(1650년)에 도전 스님이 정문을 세웠다. 숙종 병진년(1676년)에는 여담 스님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였다. 정사년(1677년)에는 불자 천해가 새로 청련당을 건립했다. 경신년(1680년)에는 여민 스님이 향적전을 창건하였다. 신유년(1681년)에는 지해, 지행 스님 등이 백련당을 건설하였다. 임술년(1682년)에는 성민, 찬증, 선찰 스님 등이 송월당을 창건하였다. 계해년(1683년)에는 성념, 찬원, 상흘 스님 등이 영월당을 창건하였다. 무진년(1688년)에는 상봉 스님이 운수암을 창건하였다. 옥수암은 공작산에 있다. 신라 성덕왕 무신년(708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했다. 조선 선조 을사년(1605년)에 중건하고 수타사(水墮寺)로 이름을 고쳤다.

 

『강원도지』의 수타사 기록은 몇 가지 논란의 불씨를 품고 있다. 우선 신라 성덕왕 무신년(708년)에 원효조사가 창건했다고 적은 부분이다. 원효대사의 생몰은 617년 ~ 686년으로 알려져 있다.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 때문에 최근 포털 사이트의 수타사에 관한 자료에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고 나온다. 조사(祖師)는 불교에서 한 종파를 이룬 큰 스님을 말한다.

 

또한 같은 해에 수타사 서쪽 끝에 있는 옥수암은 진표율사가 창건했다고도 적고 있다. 그러나 한국콘텐츠진흥원, 디지털김제문화대전, 향토문화전자대전 등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진표율사의 생몰과도 맞지 않는다. 진표율사의 정확한 생몰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개 성덕왕(702년 ~ 736년)에 태어났다는 것에 의견이 모아진다. 따라서 성덕왕 원년인 702년에 태어났어도 옥수암을 짓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율사(律師)는 계율을 잘지키는 고승을 말한다.

 

『강원도지』만 壽陀寺(수타사)로 적고, 나머지 다른 홍천읍지에서는 모두 水墮寺(수타사)로 적고 있다. 1605년에 일월사(日月寺)에서 수타사(水墮寺)로, 그리고 다시 1811년에 수타사(壽陀寺)로 이름을 고쳤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을 불심으로 물리치고자 만들었던 팔만대장경을 총지휘한 용득의가 지었다는 용수사는 ‘22칸으로 관문으로부터 서쪽 30리 금학산에 있다. 龍水寺 二十二間 自官門西距三十里金鶴山. 『여지도서』’라고 적었다. 같은 위치에 용수암이 있다는 내용도 있다. ‘龍水菴 在縣西三十里 金鶴山. 『관동읍지』. 『홍천현 읍지』’. 『홍천현읍지 규장각』은 용수사의 위치를 현으로부터 서쪽 40리 금학산 아래라고 적었다.

 

이 외에도 은적암은 현의 동북쪽 45리 가리산 아래에 있다 했고, 쌍계암은 현의 동쪽 70리 백우산 아래 있다고 했다. 관음사는 석화산에 있고, 장락사, 성방사는 모두 팔봉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쌍계암이 있는 백우산은 두촌면과 내촌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지금도 백우산 아래 내촌면 서곡리에 쌍계사가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126호인 약사여래불과 쌍봉당대선사탑비 외 부도 7기가 전해진다.

 

고려 시대 만들어진 향교는 조선 시대 지방의 대표적인 정부 주도형 교육기관이다.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한때 향교의 운영 결과가 지방 수령의 인사에 반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향교에 대한 기록은 단출하다. 몇몇 읍지에 간략하게 당시 향교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홍천현 읍지 백원정사 필사본』이 정리하고 있다.

 

‘옛 향교는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새로운 향교는 현의 북쪽 1리 즉 석화산 아래 있다. 을해년에 이건 했다. 20칸이다. 舊鄕校 在縣西二里. 新鄕敎 在縣北一里卽石花山下 乙亥移建 二十間.’

 

홍천 향토문화연구소 동언우 연구위원은 논문 ‘문헌으로 본 홍천 향교 창건(創建)과 이건(移建) 및 보수(補修)에 관한 검토’를 통해 홍천 향교가 1478년 이전에 세워졌다는 것과 1695년(숙종 21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 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근거로 『신증 동국여지승람』과 『팔도지리지』의 연관성 및 향교 관련 기록과 『승정원일기』의 홍천 향교 이건을 청하는 상소문과 숙종이 허락한 기록을 찾아냈다. 홍천군은 얼마 전 동언우 연구위원의 연구 결과에 따라 향교 입구의 안내판의 내용을 수정했다.

 

불교와 유교는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져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질문의 답을 찾아 부처와 공자와 만난다. 그 흔적이 1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홍천 구석구석에 곡절 진 역사와 함께 남아 있다.

 

 

출처 백승호 벌력 콘텐츠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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